[오일만 칼럼] ‘피지컬 AI’ 시대, 한국 제조업의 진짜 역습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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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6-10-14 00:56
입력 2026-10-14 00:10

AI 시대, 제조 강국의 역습 기회
제조 현장 데이터, 핵심 협상력
독자적 AI 통제권이 생존 조건
미중 사이, 초격차 기술 승부수

역사적으로 거대한 기술 혁명의 승자는 새로운 동력원을 실물 세계의 인프라와 결합해 낸 국가들이었다. 18세기 영국이 1차 산업혁명의 패권을 쥔 이유는 단순히 석탄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석탄을 증기기관, 철강, 철도 등 하나의 거대한 ‘물리적 체계’로 연결하는 실물 인프라 구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의 패권 역시 석유라는 에너지를 자동차, 물류 시스템이라는 실물 경제로 구현해 낸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와 맞먹는 세 번째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다. 오픈AI,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자본을 쏟아부으며 구축한 인공지능(AI)이 드디어 모니터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 머물던 지능이 자동차, 로봇, 공장, 전력망 등 실물 세계의 인프라와 결합하는 ‘피지컬 AI’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동안 소프트웨어 플랫폼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한국 산업으로선 절호의 ‘공급망 역습’ 기회가 열린 것이다.

이 역습을 주도할 우리의 핵심 무기는 바로 현장의 데이터다. 지금껏 AI 패권은 알고리즘과 컴퓨팅 파워를 장악한 미국 빅테크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AI가 실물 경제에서 부가가치를 내려면 전혀 다른 자산이 필요하다. 바로 수십 년 축적된 ‘제조 데이터’와 ‘첨단 인프라’다. 반도체 미세 공정의 수율이나 조선소의 정밀한 용접 노하우 같은 실물 데이터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AI도 무용지물이다. 글로벌 데이터 기업 팔란티어가 한국을 주목하는 것도 각 산업 밑바닥에 흐르는 이 소중한 현장 데이터를 선점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빅테크의 공세에 맹목적인 적대감이나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알고리즘 두뇌’와 우리의 ‘제조업 육체’를 결합하는 고도화된 협력 모델을 선제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정밀한 제조 현장을 빅테크 AI 기술의 최상위 테스트베드로 제공하는 대신, 핵심 기술을 공유받거나 조인트 벤처(JV)를 설립해 산업별 특화 AI를 공동 개발하는 방식이다. 데이터 주권은 지키되, 글로벌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는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스마트한 동맹’만이 피지컬 AI 시대의 진정한 승리 공식이다.

하지만 기회는 양날의 칼이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와 가전 제조 능력을 갖추고도 ‘윈텔’(윈도우+인텔) 동맹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소프트웨어 생태계에 종속되면서 결국 단순 하드웨어 조립 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핵심 두뇌(OS)를 장악하지 못한 채 하청에 만족한 대가는 잃어버린 30년이었다.

지금의 AI 혁명에서도 이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빅테크의 범용 AI에 우리의 제조 현장 데이터를 고스란히 내어준다면, 한국 산업은 21세기 AI 식민주의, 즉 ‘디지털 소작농’으로 전락할 우려가 높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종속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현장에 최적화된 전용 AI 모델을 우리 손으로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확보한 독자적인 AI 통제권은 곧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미중 반도체 전쟁 속 대만 TSMC의 ‘실리콘 방패’가 증명하듯 압도적 첨단 파운드리 인프라는 미국과 중국 모두가 함부로 단절할 수 없는 무기가 됐다.

지금의 AI 전쟁도 마찬가지다. 미국 주도의 첨단 보안망에 동참하되 범용 소재와 거대 시장에선 중국과 실용적으로 연결되는 ‘디리스킹’(위험 완화)을 펴야 한다. K배터리가 원자재는 중국과 협력하면서도 핵심 수율을 쥐고 있는 ‘스마트팩토리 제어 모델’은 철저히 보안망에 묶어 두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미국 빅테크의 AI ‘뇌’(Brain)가 실물경제를 지배하려면 한국이 가진 첨단 제조의 ‘뼈와 근육’, 차세대 에너지 인프라라는 ‘혈관’이 절실하다. 우리가 피지컬 AI를 통해 생산성과 품질에서 압도적인 ‘K제조업의 방패’를 만들어 낸다면, 미국에는 대체할 수 없는 경제동맹이 되고 중국에는 ‘무시할 수 없는 파트너’로 자리매김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을 움직이는 최고의 무기는 언제나 현장에서 나오는 ‘대체 불가능한 초격차 실물 기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일만 EBN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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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만 EBN 편집국장
오일만 EBN 편집국장
2026-10-1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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