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오발탄 행정제재
억울한 ‘갑질 꼬리표’ 떼기 전 사망평판 훼손·거래처 이탈 회복 불능
SPC 전액·한화오션은 95% 삭감제재 의결 땐 대대적 홍보하지만
대법 패소 뒤 사후구제 체계 미비
처분 오류 검증·평가 시스템 시급성과만 챙기고 책임 안 지는 구조
제재 실적만 챙기고 손 털기 일쑤
행정 제재 신뢰 훼손으로 이어져‘경제 검찰’이라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조직의 몸집을 불리고 기업에 대한 감시와 제재의 고삐를 죄고 있다. 기업의 위법 행위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심사보고서’의 내용까지 미리 공개하고 나섰다. 1심 재판 격인 ‘전원회의’ 심판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다. 공정위 제재가 법원에서 뒤집혀 과징금이 취소되거나 대폭 깎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정 제재가 최종 ‘오발탄’에 그쳐도 조사의 칼날을 휘두른 사람은 이미 인사 발령이 난 뒤다. 국장급 이상으로 영전해 또 다른 제재 대상을 찾거나 로펌으로 자리를 옮겨 수억원대 연봉을 받으며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제재받은 기업은 4~5년간의 지난한 소송 끝에 무혐의 판결을 받아도 이미 기업 이름 옆에 새겨진 ‘불공정’이란 주홍글씨 때문에 제재 이전으로 돌아가긴 힘들다. ‘아니면 말고 식’ 무책임한 공정위 제재에 기업만 피멍이 들고 있는 것이다.
2023년 4월 20일 대전의 한 장례식장에 법원 판결문이 도착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장례식장을 찾은 변호사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인이 된 의뢰인 이수환(가명)씨 영정에 판결문을 내려놓았다. 그는 영정 사진 앞에 절을 올리며 고인이 생전 그토록 바랐던 세 글자를 읊었다. “무혐의.”
중소 건설업체 대표였던 이씨는 2018년 공공기관 건설공사를 수주한 뒤 토목업체 A사에 하도급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공사 착수가 지연되자 A업체에 공사 포기각서를 받고 계약을 취소했다. 이후 A사는 이씨를 사문서 위조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고 공정위에 부당 하도급 행위라며 신고했다. 이씨는 당시 암 수술을 받은 상황에서 조사와 재판에 대응했다. 공정위는 2021년 5월 이씨의 건설사에 과징금 2억 2500만원을 부과하며 ‘불공정 하도급 거래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았다. 업체명과 함께 ‘갑질’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기사가 퍼졌고, 당시 기사는 지금도 검색되고 있다.
이씨는 공정위의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사문서를 위조했다는 혐의에 대해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각서의 인감도장이 A사 대표의 것이라고 판단해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각서가 진짜라는 사실만으로 공사 포기의 진정성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제재를 유지했다. 이후 서울고법은 2022년 12월 공정위 처분을 취소했다. 대법원은 2023년 4월 13일 ‘상고 기각’ 결정을 내리며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렇게 이씨의 억울함은 풀렸지만 이씨는 병세 악화로 사경을 헤매고 있어 과징금 취소 판결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씨를 대리한 서익준(가명) 변호사는 “고인이 건강이 나빠져 무죄 판결이 나왔다는 말도 생전에 전하지 못했다”며 “마땅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찍은 낙인이 이렇게 결론이 나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기업이 공정위의 과잉 제재로 입는 피해 사례는 개별 사업자에 그치지 않는다. 수백억원의 과징금이 법원에서 전액 취소되거나 대부분 감액된 대기업 사례에서도 제재의 적법성과 사후 책임을 둘러싼 문제가 드러난다.
SPC그룹은 2020년 7월 부당지원 사건으로 공정위로부터 64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대볍원은 2024년 과징금 전액 취소 판결을 내렸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은 2020년 11월 하도급법 위반 혐의로 152억 94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지만 지난 8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된 과징금은 95.1% 경감된 7억 4600만원이었다.
공정위 제재가 대법원에서 뒤집힐 때마다 공정위는 “대법원의 판단이 달랐을 뿐 공정위의 제재가 틀린 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잘못된 제재였다”는 공정위의 사과는 없다.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을 내느라 영업을 더는 잇지 못하고 문을 닫는 영세 기업도 많다. 이럴 때 공정위는 “사연은 안타깝지만 위법 행위를 두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법원에서 공정위가 패소한 사건을 최초로 담은 보도자료는 여전히 공정위 홈페이지에 삭제되지 않고 공개돼 있다. 결국엔 오발탄이 돼버린 제재지만 내용을 보면 해당 기업은 그야말로 중범죄자처럼 묘사돼 있다. 이 때문에 공정위가 쓴 “위법 행위를 엄중히 제재했다”는 문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보도자료를 보면 현재 공정위 고위 간부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과장 시절 남긴 이 제재 실적이 훈장이 돼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 제재가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하면 그걸로 끝이다. 공정위의 최초 판단을 대중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정정하는 사후 구제 절차는 없다. 따라서 승소한 기업은 처음 혐의가 알려졌을 때 입은 피해를 복구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법원의 판결문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최종 무혐의를 받고도 불공정 기업이란 인식을 씻어내기 어렵다.
국세청과 비교하면 책임성의 차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국세청은 과세 처분이 위법한 것으로 판명되면 경정이나 환급 등 후속 절차를 통해 납세자의 권리를 회복시킨다. 물론 공정위도 법원 판결에 따라 과징금을 취소하거나 재산정하지만 혈세 낭비를 초래하는 금전적 처분이 전부다. 기업이 4~5년간 소송 과정에서 입은 평판 훼손과 거래상 불이익은 구제받기 어렵다. 공정위 처분의 오류를 분석해 재발을 막고, 잘못된 혐의 발표를 바로잡는 동시에 중대한 과실이 확인되면 담당 조직과 의사결정 과정을 평가하는 체계가 필요한 이유다.
기업이 공정위의 심의 대상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상 유죄 낙인을 감당하고, 최종 승소해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행정 제재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공정위는 강하게 제재할수록 성과가 커지고 패소해도 책임이 없지만, 기업은 승소해도 상처만 남는다”며 “공정위 제재가 잘못됐음이 확인되면 기업의 실추된 명예를 다시 세워주는 절차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세종 박기석·김중래·김신우 기자
세줄 요약
- 공정위 과징금, 법원서 뒤집혀도 낙인 회복 어려움
- 중소기업 대표 사망 전 무혐의 확정, 뒤늦은 판결
- 대기업도 전액 취소·대폭 감액, 책임 체계 미비
2026-10-12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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