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역사프리즘] 평준화 시대가 공정에 건네는 물음
수정 2026-09-30 00:28
입력 2026-09-29 21:03
연합뉴스
최근 한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공정’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를 거치며 ‘공정’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담론이 되었다. 본래 기회와 절차의 공정성을 바탕으로 결과의 정당성까지 묻던 ‘공정’은 이제 누구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규범의 자리를 차지했다.
공정이라는 말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깊어지는 양극화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공정’ 자체가 새로운 담론은 아니다. 경제개발이 막 본궤도에 오르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를 달군 평준화 담론 역시 성장의 기회를 공정하게 나누고 그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지 물었기 때문이다.
1966년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서 수출 주도형 고도성장이 본격화된 해였다. 이 무렵부터 신문 지상에는 ‘평준화’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렸다. 이 말은 격차 해소뿐 아니라 가격 현실화나 제도 정상화에 가까운 조치까지 아우를 만큼 폭넓게 쓰였고, 성장의 과실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인식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에 벌어진 중산층 논쟁은 당시 국민들의 열망이 어디를 향했는지 잘 보여 준다. 당시 야당인 민중당은 중산계층 몰락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박정희 정부를 비판했다. 또한 “중소상공인, 중농, 봉급자, 지식인 등 중산층의 안정과 이익 증진 없이는 민주주의는 영원히 토착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당인 공화당도 근대화는 중산층 확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며 중소기업 육성을 내세웠다. 지식인들도 논쟁에 가세했다. 희소한 자본을 대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효율론과, 과잉인구와 실업 문제를 풀고 균형발전을 이끌 주체는 중소기업이라는 균형론이 맞섰다. 성장의 주체와 분배의 방향을 둘러싼 이 논쟁은 우리 사회가 격차의 문제를 공론장에서 정면으로 다룬 사례였다.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이 물음은 이듬해인 1967년 5·3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신민당 윤보선 후보는 “분배에 공정을 기하지 못한” 박정희 정부가 소수 특권 재벌을 키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초래했고 복지를 외면했다고 공격했다. 신민당은 특권을 가진 소수만 잘살고 정직한 이가 굶주리는 현실을 타파해 수탈 없는 대중경제를 확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대중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나눠 먹자는 것은 가난의 평준화를 의미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공화당은 ‘선건설 후분배’를 기본 입장으로 내세웠다. 평준화는 이렇게 격차 해소를 바라는 요구의 언어이자 성장을 우선하는 쪽에서 경계하는 비판의 언어로 동시에 쓰였다.
그러나 민생 차원에서 평준화는 절박한 요구였다. 1960년대 정부는 도시 노동자의 낮은 임금을 유지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저곡가 정책을 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갔다. 농가 소득이 도시 가구에 크게 뒤처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가 가속화하자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농민에게 곡물을 높은 값에 사들여 소비자에게 낮은 값에 공급하는 이중곡가제를 추진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를 메우고 곡가를 안정시키려는 이 장치 역시 평준화의 이름으로 불렸다. 사료 가격의 평준화, 도농 간과 계층 간 소득 수준의 평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잇따랐다.
생필품 물가를 두고도 사정은 같았다. 독과점 품목의 가격 인상이 서민 생활을 위협하자 독과점 가격을 낮춰 다른 품목과 평준화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이 흐름은 공정거래법 제정 요구로 이어졌는데 오랜 찬반 논란 끝에 1975년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공정거래라는 말이 법률의 이름에 처음 들어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960년대 후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것은 교육 평준화였다. 1960년대에 초등 의무교육이 자리를 잡으면서 졸업생이 크게 늘었으나 상급 학교의 문은 좁았다. 그 결과 일류 중학교를 가기 위해 어린이들이 밤늦도록 과외에 시달리는 입시 지옥이 펼쳐졌다. 1964년 말 중학 입시 문제의 정답을 두고 학부모들이 무즙으로 엿을 고아 들고 항의한 ‘무즙 파동’은 시험이라는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의 불신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968년 7월 15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를 발표했고 이듬해 서울을 시작으로 추첨 배정 제도를 시행해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학교마다 교사와 시설의 격차가 컸고 급히 학교를 지어 개교하면서 혼란이 적지 않았다. 경쟁의 압력이 고교 입시로 옮겨 가는 풍선 효과가 심각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1974년 고교 평준화도 도입했다.
1960년대의 평준화 담론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사회가 급속한 성장 속에서 격차를 체감하며 낸 목소리였다면 오늘의 공정 담론은 풍요 속에서도 구조화된 격차를 마주한 사회의 목소리이다. 두 담론은 성장의 기회와 과실을 어떻게 나누어야 정당한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차이도 분명하다. 평준화 담론은 격차 자체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공정 담론은 경쟁의 규칙을 엄정하게 하는 데 주목한다.
기회의 사다리가 좁아질수록 규칙에 민감해지기 마련이니 청년 세대가 채용과 입시, 인사에서 절차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이다. 그러나 규칙이 엄정해진다고 해서 사다리가 저절로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차의 공정함과 결과의 정당성이 함께 설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60년 전 평준화가 오늘의 공정에 건네는 물음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2026-09-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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