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평화 중재자’… 차기 유엔 수장 누가 되든 ‘가시밭길’ [글로벌 인사이트]

조희선 기자
수정 2026-09-29 23:54
입력 2026-09-29 19:36
다자주의 강화 이끌 새 사무총장은
81년 만에 첫 여성 리더 나오나3차 예비 투표 결과 1·2위 모두 여성
순환 관례상 중남미 출신 후보 유력최대 과제는 세계 평화 유지
러우·중동전쟁 등 지정학적 위기 속
타 협의체들에 안보리 역할 빼앗겨텅 빈 곳간도 발등의 불
예산 7% 줄고 직원 수는 19% 감축
분담금 미납도 193개국 중 72개국
오는 12월 31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현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차기 수장 선출 경쟁이 한창이다. 특히 1945년 유엔 창설 이후 81년 만에 첫 여성 사무총장이 탄생할지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현재 등록된 공식 후보 7명 중 확실한 유력 주자가 없는 가운데, 누가 수장이 되든 정치·재정적으로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한 유엔을 개혁해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점차 심화하는 지정학적 긴장과 기후 변화, 글로벌 보건 위기, 인공지능(AI)의 위협 속에서 국가 간 갈등을 중재하고 협력을 끌어낼 뛰어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비공개 예비 투표를 거쳐 단일 후보를 추천하면 총회가 최종 임명하는 방식으로 선출된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 18일(현지시간) 안보리의 3차 예비 투표에서 코스타리카 부통령 출신인 레베카 그린스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사무총장이 찬성 9표, 반대 5표, 의견 없음 1표로 선두에 올랐다. 캐럴린 로드리게스 버케트 주유엔 가이아나 대사는 찬성 8표, 반대 6표, 의견 없음 1표로 뒤를 이었다. 두 후보는 1·2차 투표에서 번갈아 1위를 차지하며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듯했으나, 3차 투표에서 모두 반대표가 늘며 대세를 확정 짓지는 못했다.
이 외에도 올라라 오투누 전 우간다 외무장관, 아르헨티나 출신의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마키 살 전 세네갈 대통령 등 총 7명이 경합 중이다. 후보 지명 절차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 막판에 새로운 인물이 참전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최종 후보로 추천되려면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의 찬성을 얻는 동시에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가 없어야 한다. 지역 순환 관례상 1991년 이후 수장을 배출하지 않은 중남미 출신 후보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에 출사표를 던진 여성 후보들이 ‘유리천장’을 깰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차기 수장이 맞닥뜨린 최대 과제는 유엔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인 ‘세계 평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는 것이다. 가자지구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 지정학적 위기가 잇따르고 있지만 국제 평화와 안전 보장 등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 안보리가 실질적인 해법을 내놓지 못하며 방관자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상임이사국 5개국이 수시로 거부권을 행사해 안보리 기능이 무력화됐다는 비판이 거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침략국인 러시아가 해당 사안에 대한 안보리의 대응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인도와 아프리카, 중남미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상임이사국에 권한이 집중된 안보리 구조가 21세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유엔 개혁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지난 22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190여개국의 의지가 5개국의 변덕에 좌우되는 체제는 공정하지도 않고 신뢰를 구축할 수도 없다”며 “안보리는 ‘세계는 5개국보다 크다’는 원칙에 따라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주요 7개국(G7),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등 다른 다자 협의체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상황에서, 신임 총장은 유엔을 중립적이고 실질적인 국제 협력의 장으로 다져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지난해 1월 취임 후 다자주의 탈퇴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초 가자지구 재건을 명분으로 ‘평화위원회’를 출범시켰는데, 조직의 역할이 대폭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유엔의 안보·평화 유지 임무가 유명무실해지고 유엔 중심의 다자주의 외교 질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텅 빈 곳간도 발등의 불이다. 올해 유엔 정규 예산은 34억 5000만 달러(약 4조 6900억원)로 지난해보다 약 7% 줄었고, 직원 수도 19% 감축됐다. 올해 7월 기준 분담금을 미납한 회원국은 193개국 중 72개국으로, 지난해 42개국에서 대폭 늘었다. 특히 정규 예산의 22%, 평화 유지 예산의 26%를 책임지는 최대 기여국 미국의 체납이 유엔의 재정 위기를 키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들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유엔과 산하 기구 지원을 대폭 삭감했다. 미국은 지난 15일 체납액 일부인 7억 2500만 달러를 납부했으나 여전히 정규 예산에서만 13억 1200만 달러가 밀려 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지난해 유엔 창설 80주년을 맞아 비용 절감과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한 ‘유엔 80’ 개혁 전담 조직을 가동했지만, 긴축 모델만으로는 회원국의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유엔의 독립성을 지켜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희선 기자
세줄 요약
- 차기 유엔 사무총장 선출 경쟁 본격화
- 첫 여성 수장 가능성, 중남미 후보 유력
- 전쟁·재정난 속 유엔 개혁 과제 부상
2026-09-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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