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가 참으로 잃은것(LA에서/임춘웅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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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04-29 00:00
입력 1993-04-29 00:00
1년전 오늘 LA는 불타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LA는 마치 화덕을 엎어 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실제는 불타지 않은 건물이 훨씬 더 많았지만 치솟는 불길의 위세와 검은 연기의 위장성으로 해서 그 광활한 도시가 모두 불바다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동안 LA가 얼마나 큰 고통속에 살아 왔는가를 외부 사람들이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점점 나빠지는 경제,치유되기보다는 깊어만 가는 인종간의 갈등,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것들이 빚어 놓은 좌절의 골이 의외로 깊다.

지난 17일 폭동의 진원이었던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배심원 평결이 일부나마 「유죄」로 났을때 LA는 잠시나마 환호했다.『우리 흑인들은 조그마한 정의 하나를 실현하는데 왜 이처럼 거대한 드라마를 펼쳐야 하는지 유감스럽다』는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목사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비록 작으나마 정의가 실현되는 큰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LA폭동의 진정한 이유인 가난의 문제,인종적 편견같은 본질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제3·제4의폭동이 일어날 개연성들이 여기에 있다.

LA는 한때 약속받은 땅이었다.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해왔을 뿐만아니라 도시의 자유로움과 그 다양성으로 해서 많은 미국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한국사람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것도 단순히 서울과의 가까운 거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번영을 거듭해온 LA경제가 기울기 시작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군수산업의 퇴조라든가 투자여건의 악화같은 것들이다.그러나 어쩌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는지도 모른다.『LA는 미국의 다른 대도시들과 함께 범죄화된 빈곤의 제3세계화하고 있다.돈과 권세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인종주의와 이윤추구 욕구가 미국사회를 인종적으로,구조적으로 양극화시키고 있다』는 칼스테이트 LA대 유의영교수의 지적이다.

LA의 경제는 때가 되고 적절한 정책적 뒷받침이 따르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인종적 갈등이나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간의 밥그릇 싸움 같은 것은 쉽사리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로 가까운 장래에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이 뼈아픈 인식이 LA의 진정한 좌절인지도 모른다.최근 LA의 남가주대학이 실시한 한 설문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한국인 폭동피해자 1천5백39명중 29%만이 재기에 자신감을 보였을뿐 무려 49%가 더 이상 장래가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LA와 LA에 사는 한국사람들이 다같이 앞으로 나아가지도,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정신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있다.LA는 실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LA가 참으로 잃은 것은 꿈을 잃은 것일 것이다.
1993-04-29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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