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 판단에 기대는 피해자 보호
“당장 가벼워 보여도 이후 심각해질 수도
최초 상황만 보고 미래까지 예측 힘들어”
가정폭력·스토킹 유형마다 법령도 제각각
성평등부 “개선 사안 관계부처에 적극 제안”
지난해 8월 서울의 한 지구대 소속 경찰관은 가정집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불은 이미 진화된 상태였고 겉보기엔 가정 환경에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이 집 아내인 A씨가 지구대에 찾아와 “오랜 기간 남편에게 폭행당했다”고 털어놓자 사안이 바뀌었다. “화재도 가정폭력 때문이었느냐”는 경찰관의 물음에 A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 후 약 1시간 뒤 경찰관이 A씨에게 확인 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로 비명이 들렸다. 경찰은 순찰차 3대를 급파해 남편을 현행범 체포하고 A씨를 분리 조치했다.
서울 송파구 장모 살해·아내 납치 사건과 제주 스토킹 살인 사건 등 관계성 범죄에서 비롯된 강력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경찰의 피해자 보호체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위험성 평가·피해자 안전 조치·사후 모니터링 등 시스템이 있지만, 쏟아지는 신고 중에서 초기에 위험성을 판별해 내긴 쉽지 않다는 게 현장 경찰관들의 목소리다. 현장 판단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고위험 사건을 제때 포착하고 지속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일선 경찰관들은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에 대해 최초 신고만으로 이후 상황을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뚜렷하게 밝히지 않거나, 가해자와 화해·재결합하는 과정에서 위험의 정도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현장 대응의 어려움으로 꼽혔다.
서울의 한 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은 “가정폭력 신고가 하루 7~8건 들어와도 그중 일부만 형사사건으로 접수된다”며 “당장은 경미해 보이는 사건이 이후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구대·파출소 등 현장 경찰관이 적극적으로 추가 확인에 나서면 위험을 조기에 발견할 수도 있지만, 순찰과 출동 업무를 하며 관계성 범죄 모니터링까지 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관계성 범죄 신고 증가도 현장 부담을 키우고 있다.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가정폭력 신고는 2021년 21만 8680건에서 지난해 28만 9368건으로 4년간 32.3%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교제폭력 신고는 5만 7305건에서 10만 5327건으로 무려 83.8% 늘었다.
서울 일선서 경찰관은 “야간 신고 10건 중 8건꼴로 관계성 범죄 신고”라며 “변화한 신고 수요에 맞춘 인력 배치와 대응체계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스토킹이냐, 가정폭력이냐에 따라 피해자 보호조치를 연장하는 절차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보호 체계의 공백으로 지적됐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상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접근금지·위치추적 등 ‘잠정조치’는 경찰이 직접 연장 신청할 수 있도록 명문화돼 있다. 반면 가정폭력처벌법에는 가해자에 대한 ‘임시조치’에 대해 경찰의 연장 신청 권한과 관련 절차 등이 규정돼 있지 않다. 사실상 가정폭력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임시조치 연장을 신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은의 변호사는 “가정폭력은 법원이 임시조치를 결정할 때의 위험한 상황이 기한이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연장 신청 책임을 피해자에게 지운 것은 입법 공백”이라고 지적했다.
李 대통령 “특단의 대책 수립…인력·조직·장비 등 현장 대응 역량 강화” 주문성평등가족부 관계자는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똑같은 관계성 범죄인데도 불구하고 피해자 보호 조치와 관련해서는 서로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며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안들에 대해서 저희가 관련 부처에 좀 더 적극적으로 제안하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청도 뒤늦게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격리 조치와 접근금지 위반 제재를 스토킹 범죄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밝혔다. 현재는 가정폭력 가해자를 유치하려면 가해자가 퇴거·접근금지 등 법원의 기존 임시조치를 위반하고 가정폭력이 재발할 우려가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위반 없이도 재발 위험 등을 고려해 유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근 관계성 범죄로 인한 인명 피해, 흉기 난동과 같은 흉악범죄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어 국민의 불안이 매우 크다”며 “특단의 대책을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보호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전자장치 착용자 등 고위험군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등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위험 수준별 맞춤형 예방 대책, 실효적 피해자 보호 방안을 꼼꼼히 마련하라”고 당부했다.
또 “위급 상황 발생에 대비해 현장 대응 역량도 한층 강화해야 한다”며 “인력과 조직, 장비의 대대적 보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이지·정회하 기자
세줄 요약
- 관계성 범죄 신고 급증, 피해자 보호 공백 지적
- 초기 신고만으로 위험 예측 어려워 현장 부담 가중
- 정부·경찰, 보호조치와 대응 역량 강화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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