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아, 시월의 냄새

황수정 기자
수정 2026-10-12 01:52
입력 2026-10-11 22:41
이즈음 나의 즐거움은 논밭으로 에워싸인 낯선 마을길을 문득 지나쳐 보는 것이다. 흙땅에서 벌어지는 고요하고 치열한 가을의 일은 얼마나 갸륵한지.
시월은 형제자매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의 큰누나 큰언니 같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푸른 물기를 비워내고 제 살을 내리는 때. 시월이 걸어가는 저 뒷모습 좀 보라고, 들길에서 나는 큰소리로 떠들어 주고 싶다.
주인은 뭐하느라 바빴을까. 여태 열매를 매단 고추밭, 콩밭. 재채기라도 크게 하면 마른 꼬투리에서 콩알들이 와르르 쏟아지게 생겼다. 푸른 목을 빼는 가을무, 속 채울 채비를 끝낸 알배추, 할 일 다했다고 뻗대 누운 고물 트랙터.
이 말없는 이야기들을 말이 없다고 몰라보는 우리들의 눈먼 일은 말이 되는 것인지. 매캐하고 들큰하고 누릿한 열매들의 체취와 구수하고 비릿한 마른 흙의 냄새. 어느 조향사도 만들지 못할 냄새. 아, 시월이 뒤척이는 냄새!
누가 내게 말을 걸어 주면 좋겠다. 이 냄새를 잊어먹고 사는 일이야말로 답답하고 아까운 일이라고, 누가 내 곁에서 맞장구를 쳐주면 좋겠다.
황수정 논설실장
2026-10-1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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