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처럼 정확하게, 주판보다 상의를”…김종희가 세운 한화의 원칙 [창업주의 비밀노트]

하종훈 기자
수정 2026-10-05 11:29
입력 2026-10-05 11:29
세줄 요약
- 화약을 업으로 삼은 김종희의 창업 철학
- 정확성과 정직을 앞세운 경영 원칙 확립
- 이리역 사고 뒤 책임 보상으로 상도의 실천
한화그룹 제공
올해 한화그룹은 자산총액 기준 재계 5위에 올랐습니다. 자산총액은 149조 6050억원에 달합니다. K9 자주포와 다연장로켓 천무를 앞세운 방산부터 조선, 우주항공, 에너지와 금융까지 사업 영역도 넓어졌습니다. 1952년 설립된 작은 화약회사가 74년 만에 자산 150조원에 육박하는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거죠. 시작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사람과 한 가지 물건을 만나게 됩니다.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와 ‘화약’입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요.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와요?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랍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였습니다. 당시 물자가 부족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설탕, 비료, 면직물 등 생필품을 수입하면 큰돈을 벌었습니다. 주변에서도 김 창업주에게 돈이 되는 물건을 들여오자고 권했습니다.
김 창업주의 생각은 달랐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려면 광산을 개발하고 도로와 철도를 놓고 댐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게 화약이었습니다. 김 창업주가 말한 ‘솔잎’도 화약사업이었을 겁니다. 점차 기업이 커지며 기계, 화학, 에너지 등으로 사업은 확장됐지만 국가 산업에 긴요한 일을 하자는 생각은 일관됐습니다.
한화그룹 제공
“아이 해브 다이너마이트”…정확하지 않으면 화약인이 아니다김 창업주는 1922년 충남 천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사를 지으라는 부친의 뜻과 달리 경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싸움에 뛰어들어 퇴학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1942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화약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떠난 회사의 지배인을 맡았지만 직원들의 월급조차 주기 어려웠습니다. 김 창업주는 화약을 팔려 무작정 용산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갔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미군 헌병에게 “유 노우 다이너마이트? 아이 해브 다이너마이트!”라고 외쳤습니다. 놀란 헌병이 권총을 꺼내 들고 몸수색까지 했지만 통역을 통해 오해가 풀렸습니다.
며칠 뒤 미군 장교들이 화약고를 확인했고, 김 창업주가 말했던 재고량과 실제 수량은 정확히 맞았습니다. 그는 “화약인은 화약처럼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화약은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정확하게 터져야 합니다. 작은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화약의 특성이 사업 원칙이 된 셈입니다.
그는 1952년 한국화약을 세웠고 1957년 국산 다이너마이트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베어링과 석유화학, 에너지 등으로 사업을 넓혔지만 하나하나 바닥을 다지며 자신이 국가에 긴요하다고 믿는 사업을 중심으로 확장에 나서는 원칙은 잃지 않았습니다.
최고권력자가 권한 사업에도 “안 됩니다”1963년 김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한국화약이 볏짚을 이용해 펄프를 만드는 사업을 했으면 한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김 창업주는 기획실에 사업성 검토를 지시했지만 결론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를 1년에 단 한 번 하는 데다가 이미 볏짚은 초가지붕, 가축 사료, 가마니 등을 만드는 데 쓰였죠. 원료 확보도 어렵고 경제성도 떨어졌습니다.
특히 차관으로 공장을 지었다 실패하면 한국화약만의 손실이 아니었죠. 보증을 선 정부가 빚을 떠안을 수 있기에 사업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에게 ‘사업보국’은 정부가 시키는 일을 무조건 맡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업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국가에 부담이 된다면 정권이 권해도 거절한 거죠. 반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수용했습니다. 1973년 대일유업, 지금의 빙그레를 인수한 것은 공장 폐쇄가 낙농가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서였죠.
한화그룹 제공
“회장증이라도 있어야죠”…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어느 일요일 김 창업주가 예고 없이 부평의 한국베어링 공장을 찾았습니다. 새로 들어온 경비원은 그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김 창업주가 회장이라고 밝히자 경비원은 “회장님이라면 당연히 회장증이 있을 것 아니냐”며 입장을 막았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공장 사장이 경비원을 나무라자 김 창업주는 규정을 제대로 지켰으니 상을 줄 일이라며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는 직원들을 세심하게 챙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틈이 나면 신입사원의 인사카드를 보며 이름과 얼굴을 익혔고, 자신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던 신입사원을 복도에서 만나면 먼저 이름을 불러 놀라게 하기도 했답니다.
남에게 후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무희’성공한 사업가였지만 김 창업주는 자신에게 쓰는 돈에는 인색했습니다. 20년 넘게 같은 시계를 차고 다녔고 구멍 난 양말도 “구두를 신으면 보이지 않는다”며 그대로 신었습니다. 회사 손님에게 차비를 챙겨줄 때는 읽던 신문의 귀퉁이를 손톱만큼 찢어 거기에 금액을 적어 비서에게 건넸습니다. 종이 한 장도 아꼈던 그는 물욕이 없다는 의미인 ‘무희’(無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돈에 피해를 주는 일에는 엄격했습니다. 태평물산 직원의 업무 처리가 늦어져 다른 회사에 피해를 주자 “내 돈이 아까우면 남의 돈도 아까운 줄 알아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또 자사 직원들의 월급 지급이 하루 늦어졌을 때에도 자금 담당 직원을 호되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주판보다 상도의가 먼저다”이런 ‘상도의’ 원칙이 가장 혹독하게 시험받은 것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였습니다. 한국화약의 폭발물을 실은 화물열차가 폭발해 수많은 사람이 숨지거나 다쳤고, 역 주변 시가지가 큰 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우선 법적 책임부터 따져보자는 내부 의견에 김 창업주는 “장사는 주판을 놓기 전에 상도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사고 원인 확정 전에 사과문을 내도록 했습니다. 이어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를 찾아 자신의 재산을 피해 보상에 내놓겠다고 했고, 한국화약이 90억원을 보상하기로 했습니다. 정부가 책정한 이리 복구사업비 130억원의 약 70%였습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로 환산해 보면 지금은 약 900억원, 국민소득 대비로 추정해 보면 지금의 약 1조원에 달합니다.
“지난 25년간 이만하면 잘해온 것 아니오.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다시 시작합시다.”
김 창업주는 당시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뼈아픈 비극은 역설적으로 후대에는 대표적인 책임 경영의 사례로 남습니다.
한화그룹 제공
김종희가 남긴 ‘솔잎’김 창업주는 1975년 고향 천안에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세웠고 이듬해 북일고등학교를 열어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1981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난 뒤 한국화약그룹의 경영권은 장남 김승연 회장에게 이어졌고, 1992년 지금의 한화그룹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돌아보면 화약을 ‘업(業)’으로 삼았던 김 창업주의 사업은 기계, 화학, 에너지 등으로 크게 넓어졌지만 그가 세운 ‘상도의’라는 원칙은 한화그룹의 DNA로 이어집다. 인간 김종희가 ‘송충이로서 먹고 살겠다던 솔잎’은 화약이라는 한 우물만을 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잎처럼 사철 푸르른 그의 신념과 원칙이었던 셈입니다.
하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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