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美)의 인식은 철저히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다. 우리는 시대와 역사가 짜 놓은 프레임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한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대작 ‘오디세이’에서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연기한 배우 루피타 뇽오의 캐스팅을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원작에서 헬레네는 금발 백인이고 문명 간 충돌을 일으킬 만큼 아름다웠는데, 감독이 이런 설정을 무시했다는 게 비판자들의 생각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할리우드의 강박증이 인류사적 대서사시에 오점을 남겼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배우의 외모를 향한 적나라하고 수준 낮은 품평이 더해진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생각한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세계와 삶의 목적임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수단으로 취급했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은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말초적 감각에 빠진 인간은 무엇이 아름다운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이 왜 나에게 아름다운 상태로 있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아닌 감각적 쾌락의 포로가 된 우리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낯설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기어이 거부한다.
뇽오의 신체로 재현된 ‘새로운 헬레네’는 우아한 방식으로 인간의 미적 관성에 저항한다. 영화가 옳게 짚었듯 헬레네는 아가멤논의 패권적 야욕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남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아내의 배신’만큼 극적인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헬레네 얼굴 한쪽에 깊게 팬 상처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인간의 이기심에 복무함을, 그리고 목적에 따라서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뇽오의 얼굴을 한 헬레네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또 인간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헬레네와 똑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 언니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오직 전쟁을 위해 자식을 바친 비정한 남편의 심장에 칼을 꽂는 뇽오의 얼굴은 뒤틀린 권력 의지의 작동을 멈추는 서늘한 저항이다.
모든 문학이 그렇듯 ‘오디세이아’ 역시 호메로스가 아닌 인류 전체의 소유물이다. 놀런은 뇽오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배우 엘리엇 페이지가 연기한 병사 시논도 중요한 인물로 배치했다. 놀런의 과감한 재해석은 오히려 남성 중심적인 서구 문명이 곧 세계 전체이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이렇게 말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역동적이어야 한다. … 사회 조건이 변하듯이 사회 조건에 저항하고자 고안된 지식과 실천 역시 변화한다.” 물론 놀런과 뇽오의 헬레네가 마지막 헬레네는 아닐 것이다. 더 다채로운, 더 새로운 헬레네들이 나타나 아름다움을 향한 우리의 굳어진 관념을 깨뜨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