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이종찬과 이인제, 그리고… /육철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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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7-08-18 00:00
입력 2007-08-18 00:00
독일의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는 저서 ‘위대한 패배자’(Grosse Verlierer)에서 역사상 패배한 인물들의 유형을 소개했다. 대표적 인물과 유형을 보면, 전쟁에서 졌지만 적군한테서도 존경받은 독일군의 에르빈 로멜 장군을 ‘영광스러운 패배자’로 불렀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보여준 인간미와 신사도 정신에 점수를 많이 주었단다.‘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로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후보 보다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제도 때문에 대권을 놓친 앨 고어를 꼽았다. 안전수칙 소홀과 지휘 미숙으로 승객 400명을 더 살릴 기회를 놓친 에드워드 스미스 타이타닉호 선장은 ‘비참한 패배자’로 분류됐다. 희극 ‘살로메’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를 저지른 죄로 감옥에 갔다오고 거지로 생을 마쳤는데, 그는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 부류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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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철수 논설위원
육철수 논설위원
나는 슈나이더의 패배자 분류법에 흥미를 느끼며 상당부분 공감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패배자의 일생을 조명함으로써 승자 독식의 기존 역사관에 반기를 들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저술 취지에 더 마음이 끌린다. 승자는 승리의 기쁨만으로 충분히 보상이 되겠지만, 패자는 아픔을 삭이고 경우에 따라 승자에게 굴욕적인 협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패자에겐 승자 이상의 아량과 겸손과 인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민의 정이 더 간다.

한나라당이 20일 대통령 후보를 확정한다. 경선 출마자 4명 가운데 3명은 패배자다. 유력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는 1년이상 경쟁하면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분위기를 보면 패자가 승복하고 협조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기회에 경선 불복의 과거사를 들춰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거기엔 패자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한 모범답안이자 반면교사가 들어 있어서다.

멀리 갈 건 없고 1990년대 이후 역대 경선을 보자.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이종찬 후보가 맞붙었다. 세 불리를 느낀 이종찬은 경선을 불과 이틀 앞두고 불공정·위장 경선을 이유로 경선 거부를 선언했다. 이종찬은 탈당해서 새한국당을 창당해 대통령 후보가 됐다가, 대선 직전 사퇴하고 국민당 정주영 후보를 지지했다. 이종찬은 어떤 패배자일까. 슈나이더 분류법을 빌리면, 그는 타이타닉호 스미스 선장처럼 지도자로서 능력이나 판단력 없이 이리저리 휩쓸렸으니 ‘비참한 패배자’에 가깝다.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대결했다. 이인제는 패배 후 승복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회창 측이 심한 견제와 무관용으로 일관하고, 아들 병역비리로 지지율이 자신보다 떨어지자 경선불복을 선언했다. 몇달동안 국민 지지율이 더 높자 그로서는 ‘승리를 사기당한 패배자’로 느꼈음직하다. 욕심을 부려 국민신당을 만들어 본선에 나섰지만, 결과는 김대중·이회창에 이어 3위(500만표 득표)에 그쳤다. 그 바람에 40만표 차로 정권을 놓친 신한국당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이쯤 되면 ‘비참한 패배자’다. 그의 패배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세론을 업고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노무현 후보에게 밀리자 경선을 중도에 포기했다. 결국 그는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틀 후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또 어떤 패배자가 나올지 궁금하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2007-08-18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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