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비장한 각오를 장착하고 석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상 지적 만용에 가까운 자신감을 충전한 채 출발했지만, 그 만용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석사 논문을 쓰는 과정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진실의 시간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문법적 오류가 없을 뿐 아니라 뜻도 통하는 문장으로 빚어내는 것, 그리고 그 문장과 문장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확인하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소크라테스적 무지’를 그렇게 배웠다.
대학교 앞 제본소에서 큼지막한 하드커버로 장정해 금박으로 논문 제목과 글 쓴 사람의 이름까지 적어 넣은 논문을 동료들에게 증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면 냄비 받침으로만 사용하지 말아 줘.” 책의 용도는 다양하다. 적당한 두께라면 베개가 없을 때 응급 베개 대용으로도 쓸 수 있고, 그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책은 무엇인가를 평평하게 펼 때 누름판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책에는 그때는 짐작도 못 했던 또 하나의 쓸모가 생겼다. 라면 냄비 받침도, 베개도, 누름판도 아닌 인공지능(AI)을 학습시키는 재료로서의 쓸모다. 앤스로픽이 수백만 권의 실물 종이책을 구매한 뒤 외주 업체를 통해 책등을 잘라내고 고속 스캔 장비에 넣어 디지털화한 후 원본을 파괴해 AI 데이터 학습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저작권 침해 소송 과정에서 알려졌다. 중고서점에서 2022년 이전에 출판된 책을 대량 주문하는 특이한 징후도 파악되어 그 경로를 추적해 보니, 대량 주문된 중고책의 도착지는 다름 아닌 AI 개발회사였다고 한다.
왜 2022년 이전의 책이었을까. 챗GPT가 등장한 2022년 11월 이후, 웹에 새로 쌓이는 글의 상당량은 생성형 AI가 쓰거나 손을 댄 문장이다. AI를 AI가 만든 글로 학습시키면 오류와 상투어가 대물림되며 품질이 열화되는 ‘모델 붕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이 직접 쓰고 편집자가 다듬은 2022년 이전의 문장이 담긴 책은 희귀자본이 되었고, AI 개발 회사는 그 희귀자본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대학에서 글을 대신 써 주는 ‘자동 글쓰기 기계’인 생성형 AI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사이에 교수는 논문을 쓸 때, 학생은 쓰기 싫은 과제를 대신 쓰게 하려고 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제법 글을 잘 쓰지만, 기계가 쓴 글은 티가 난다는 지적이 늘어나자 이제는 기계가 쓴 글을 마치 인간이 쓴 것처럼 포장해 주는 AI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신성장 산업다운 재빠른 응용력이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책 대신 읽고 요약해 주고 글까지 자동으로 써 주는 기계에 더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2022년 이후 희귀자본이 된 인간의 노력만으로 글을 쓰는 능력 배양을 고등교육의 차기 도전 과제로 삼을 것인가. 인간의 종말이라는 괴담이 기분 나쁜 예지몽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