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기다렸는데 얼마 받을지 기준도 없어”…가습기살균제 국가 배상 접수 첫날 [취중생]
이지 기자
수정 2026-10-10 11:00
입력 2026-10-10 11:00
세줄 요약
- 가습기살균제 국가배상 접수 시작, 20년 만의 절차
- 배상 기준 미정으로 피해자들 기대와 불안 교차
- 사망자·장기피해자 많아 공정한 산정 과제 부각
“늦었지만 다행” “배상액 기준 없어 우려도”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기자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입니다. 시대도 세대도 바뀌었지만, 취재수첩에 묻은 꼬깃한 손때는 그대롭니다. 기사에 실리지 않은 취재수첩 뒷장을 공개합니다.
지난 8일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시행되며 국가 주도 배상체계가 본격 가동됐습니다. 1994년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해 2006년 폐손상 환자가 발생한 지 20년, 2011년 역학조사로 인과관계가 확인된 지 15년 만입니다. 국가가 뒤늦게 배상에 나선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구체적인 배상 기준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아 피해자들의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배상 접수가 시작된 첫날 오전 9시쯤 서울 은평구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접수처에서 만난 황동건(65)씨는 “25년이 지나서야 국가가 배상에 나섰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황씨는 1999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가 폐섬유화와 천식을 진단 받았고, 투병 과정에서 직장을 잃고 살던 아파트까지 처분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늦었지만 배상이 진행돼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막상 얼마를 받는지 기준도 없어 제대로 제도가 시행되는 건지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내년 4월 7일까지 6개월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손해배상 신청 접수를 받습니다. 특별법 개정으로 피해자들이 별도 소송을 하지 않아도 국가가 주도하는 배상 절차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국가와 사업자가 책임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배상 항목에는 치료비와 간병비, 장해·유족배상(일실수익), 장례비, 위자료, 지연이자 등이 포함됩니다. 기존 피해 인정자는 종전 제출 자료를 활용할 수 있고 소득·진료기록 등 추가 자료도 제출 가능합니다.
어린 시절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던 피해자는 어느덧 성인이 됐습니다. 경기 포천시에서 어머니와 함께 접수처를 찾은 정모(25)씨는 두 살 때부터 가습기살균제에 수년간 노출됐고 이후 천식과 뇌전증, 피부질환 등을 앓아 왔다고 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건강 문제는 학업 중단과 취업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정씨의 어머니 장모(65)씨는 “나도 가습기살균제로 천식을 앓고 있지만 아이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데 이 일로 삶이 완전히 무너진 걸 어떻게 온전히 배상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습니다.
배상이 이뤄지기 전 세상을 떠난 피해자도 많습니다. 지난달 말까지 가습기살균제 피해관리센터에서 공식 집계한 사망자 수는 1962명입니다.
이날 은평구 접수처에서 만난 권모(63)씨의 남편도 이 가운데 한 명입니다. 권씨의 남편은 매일 운동하며 건강관리를 하던 사람이었지만, 가습기살균제 사용으로 폐섬유화증 등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하다 2021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권씨는 “좋다는 광고를 보고 마트에서 살균제를 직접 사와 남편이 사용하는 가습기에 넣었던 것을 자책한다”고 토로했습니다. 아들 김모(40)씨는 “지금까지 지난한 과정이었다. 배상액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신청부터 받으니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배상 신청이 시작됐지만 각종 피해 규모를 어떻게 산정할지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정부가 지난해 10월 피해자들의 정보 교류와 소통을 위해 연 서울역 인근 가습기살균제 소통공간에서도 같은 날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신청 방법을 안내하는 중 배상액 기준에 대한 문의가 잇따랐습니다.
좁은 피해 인정 범위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지난 7월 기준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 질병으로 인정하는 질환은 약 15개에 불과하고 피해구제 인정자는 6037명에 그칩니다. 국가 배상이 첫발을 떼기까지 지난 20년간 피해자들이 겪은 손실이 공정하고 충분하게 반영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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