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의 아침] AI가 써주는 사과문

신진호 기자
수정 2026-10-09 02:04
입력 2026-10-08 21:01
AI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
사과문도 대신 써주는 AI
대필의 대중화 문제없지만
인간다움의 상실은 아닐지
인공지능(AI)의 발전 속도가 어지러울 정도다. 글과 그림, 음악, 프로그래밍 등에서 전문가 이상의 결과물을 보여준 지는 한참 됐다. 이제는 학계가 오랫동안 씨름해 온 난제도 해결할 정도다. 거의 모든 직군이 자신의 일자리가 언제 사라지게 될 것인지 불안에 떨고 있다.글로 먹고사는 직업인지라 기자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이 일을 못 하게 될 때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느냐는 고민은 AI 등장 이전에도 있었지만, 나보다 글을 몇 배는 더 논리정연하게, 때로는 더 아름답게 쓰는 AI에 내 수준의 글로는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의 과제, 학자의 논문, 회사원의 보고서를 AI가 대신 써주고, 심지어 고전문학 번역을 AI에게 맡겨 대량 출판까지 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어떤 글들을 보면서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바로 사과문이다.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사과문들이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각종 논란의 당사자들이 쓴 사과문을 보면 직업병인지 몰라도 고쳐주고 싶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하는 바람에 사과문에 대한 추가 사과문을 내놓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에 온라인상에서는 ‘사과문의 정석’이라든지 ‘잘못된 사과문의 대표적 사례’ 등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과문의 정석을 짧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사과해야 할지 정확히 파악하고 ●잘못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사과하는 마음가짐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다른 이의 책임을 굳이 언급하지 않으며 ●사과하는 쪽의 이득이나 피해도 언급하지 말아야 하고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후속 조치를 밝힌다.
최근에도 크고 작은 논란으로 발표된 사과문이 여럿 있었다. 이들 사과문 중 열에 아홉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마도 AI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023년 미국 밴더빌트대 피바디 칼리지는 다른 대학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과 관련해 교내 학생들에게 안전을 당부하는 메일을 보냈는데, 메일 말미에 챗GPT가 작성했다는 표기를 지우지 않는 바람에 논란이 됐다. 공동체와 연대를 말하는 메시지를 깊은 고심 없이 AI에게 맡긴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 논란이 된 한 자영업자는 자신이 고의로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AI와 나눈 답변을 공개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또 다른 논란을 부르고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AI에게 사과문을 맡기는 것이 과연 비판거리일까 싶기도 하다. 기업이나 연예인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법무팀이나 소속사 또는 계약된 법률대리인이 사과문을 대신 써왔다. 적지 않은 돈을 써서 인간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이 AI 도움을 받는 것을 고깝게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사과 이후 충분히 책임을 지고 약속한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가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AI에게 맡기지 않고도 잘 쓴 사과문인들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딘지 씁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스스로 잘못을 돌이켜보는 영역까지 AI에게 맡겨버리는 풍경 때문이 아닐까. 학창 시절 반성문을 쓸 땐 어떻게든 백지를 채워 넣으려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과정에서 내가 한 잘못을 깨닫는 데에 이르곤 했다. 그러나 AI에게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 사과문을 작성해 줘’라는 명령문을 넣고 생성된 사과문을 검토하기만 하는 과정에서 과연 내 마음속에 진정한 반성이 ‘생성’될 수 있을까.
인류는 드디어 인간이 쉽사리 할 수 없는 영역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까지 맡겨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는 건 아닐지, 과연 잃어도 괜찮을 것인지 고민해 본다.
신진호 온라인뉴스부 차장
2026-10-09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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