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방인 된 영웅…인간의 존재를 묻다

최여경 기자
수정 2026-10-06 00:50
입력 2026-10-06 00:11
안트로폴리스 연작 ‘오이디푸스’
스스로 취약함을 취한 영웅그를 짓누르는 결핍·외로움
세상의 진실을 표현하는 건
인간 아닌 개·금강석 등 사물
국립극단 제공
무대는 온통 하얗다. 거대한 흰 장벽이 객석 앞 좁은 띠만 남긴 채 극장을 가로막고, 그 답답함은 오이디푸스를 짓누르는 결핍과 외로움으로 번진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하리라는 신탁을 피해 달아나다 끝내 그 운명을 완성한 왕.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도시국가 테베를 구한 영웅이지만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3부 ‘오이디푸스’(강량원 연출)의 오이디푸스는 장애와 이방인의 처지 등 세상의 취약함을 한 몸에 지닌 자다.
“보지 못하는 자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는가”라는 오이디푸스에게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듣지 못하는 자가 무엇을 판단한다고 말하는가”라고 되묻는다. 보지 못하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 사이에서 진실을 말하는 건 신의 입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말·개·염소·독수리·금강석, 인간이 아닌 것들이다. 소품이 거의 없는 빈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의 선명한 말과 무용 같은 몸짓은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극이 절정에 이르면 장막은 빨강으로 물들고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오이디푸스가 어린 안티고네와 길을 나설 때에야 장벽이 비로소 열린다. 커다란 LED 화면으로 비추는 길은 희망보다는 고난에 가까워 보인다.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안트로폴리스’는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안트로포첸’과 도시국가 ‘폴리스’를 합친 제목처럼, 테베 왕가의 신화로 지금의 인간 사회를 되묻는 5부작이다. 2023년 함부르크에서 초연됐고, 국립극단은 지난해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 2부 ‘라이오스’에 이어 올해 3~5부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인다.
신의 광기와 저주로 채워진 1·2부를 지나 ‘오이디푸스’(10월 18일까지)는 연작이 신탁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다.
4부 ‘이오카스테’(서지혜 연출·10월 28일~11월 21일)는 3부에서 목숨을 끊은 이오카스테를 되살렸다. 왕위를 두고 전쟁을 벌이려는 두 아들을 중재하기 위해서다. 짧은 휴전, 협상, 결렬이 반복되는 모습은 지금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대로다. 서 연출은 “피와 폭력에서 발생한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대와 다름없는 비극이 계속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로 읽었다”면서 원작의 장면을 오늘의 뉴스 화면 위에 포갰다.
5부 ‘안티고네/에필로그’(정영두 연출·12월 2~26일)는 중재가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한다. 되살아난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의 손을 잡고 떠난 안티고네는 모두 여성이지만, 남은 두 편이 비추는 것은 성별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역할이다. 쉼멜페니히도 두 사람에게 능동성을 부여하며 “절대적 권력은 없지만 도덕적 용기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정 연출은 “내 신념과 다른 사람의 신념이 부딪힐 때 그것을 풀어가는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오는가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카드모스의 건국에서 시작된 테베 왕가의 비극이 어디에 닿을지는 ‘에필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여경 선임기자
세줄 요약
- 오이디푸스, 영웅이 아닌 취약한 인간의 재해석
- 빈 무대와 사물의 발화, 진실 전달 장치 부각
- 안트로폴리스 연작, 신탁에서 인간 이야기로 전환
2026-10-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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