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귀의 시선] 상처를 잊지 않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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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6-09-10 00:46
입력 2026-09-10 00:46

“상처 없이 지나온 시간이 있나
몸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죽음
살아 있는 부분이 차오르면서
상처를 덮고 새 껍질이 생긴다”




내 자리인 이곳, 그 흙으로 내가

빚어졌고 또 짊어져야 하는 이곳에

늙은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자신을 경이롭게 치유하는 거대한

시카모어 한 그루. 울타리가 그 나무

에 묶이고, 못이 박히고 도끼질과

칼자국으로 깎여나가고 벼락까지

맞았다. 무성히 자란 어느 한 해도

나무를 해치지 않은 해는 없다. 그

몸에는 속이 빈 곳이 있다. 그건

나무의 죽음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부분은 그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희게 넘쳐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 모든 상처 위로 이음새 없는

흰 나무껍질이 돋아났다.


―웬델 베리, ‘시카모어’ 중에서




늙은 나무 앞에 서 본 적이 있는지? 나무의 푸른 이파리보다 그 몸에 난 상처를 응시한 적이 있는지? 지난달 31일 별세하신 웬델 베리의 시 ‘시카모어’, 흔히 플라타너스라 부르는 나무다. 1934년 켄터키에서 태어난 베리는 젊은 날엔 도시로 가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없이 살았다. 환경 위기, 산업화된 농업, 대량소비 문화를 비판한 베리는 인간이 땅과의 관계를 잃어버릴 때 자기 자신을 잃는다고 했다.

여기 나무가 있다. 아름답고 온전한 나무가 아니라 상처 입어 상한 나무다. 그런데 시인은 시의 시작을 조금 달리한다. 땅에 대한 질문으로. 대개 땅은, 누구의 땅인지 소유의 언어로 말해지지만 시인의 질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곧 짊어지는 것임을 향한다. 그 땅을 딛고 선 늙은 나무는 도끼와 칼은 물론, 벼락도 맞았다. “무성히 자란 어느 한 해도 / 나무를 해치지 않은 해는 없다”니, 잘 자랐다는 것과 다쳤다는 것이 한 문장에 함께 있다. 삶은 곧 상처라서. 오래 살아온 존재일수록 그 몸에는 시간이 남긴 상처가 많다.

돌아보면 상처 없이 지나온 시간이 있던가? 무성하게 뻗어가는 시간에 어쩌면 가장 큰 상처가 있었으리라. 그래서 나무속에는 빈 구멍이 있다. 나무의 “죽음”이다. 죽음이 살아 있는 몸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살아 있는 부분이 희게 차올라 바깥으로 뻗는다. 상처를 덮으며 새 껍질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베리가 말하는 치유는 상처가 없던 때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나무는 못 자국도, 벼락 자국도, 잘려나간 자리도 지우지 않는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인은 “제 역사의 옹이들”을 몸에 그대로 지닌 채 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오랜 세월 구부러지고 뒤틀리면서 나무는 오히려 “기묘한 완전함”에 이른다. 이 표현 앞에 나는 오래 머문다. 완전함은 흠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베리의 나무는 정반대다. 그 모든 상처와 우연을 제 삶의 형태 속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무는 전에 없던 형상이 된다.

이 시는 고통을 쉽게 정당화하지 않는다.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거나 상처가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든다는 말은, 가끔, 좀 잔인하게 들린다. 나무에 박힌 못은 여전히 못이고 칼자국은 여전히 폭력의 흔적이다. 상처받은 존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상처 준 행위를 정당화하진 않는다. 이런 시선의 차이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더 중요하다. 우리는 자연의 ‘회복력’에 자주 기대지만, 나무가 스스로 상처를 아물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무에 계속 못을 박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얼마 전 히말라야 일대에서 일어난 참사 앞에서도 그 생각을 한다. 그걸 다만 ‘자연재해’라 부를 수 있을까. 기후변화에 큰 책임이 없는 이들이 기후 위기의 결과를 먼저 감당하는 현실, 그 무수한 죽음 앞에서 물어본다. 땅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묻지 않고 개발과 착취를 계속하는 문명, 땅을 살아 있는 관계의 장소가 아니라 끝없이 꺼내 쓸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문명이 계속될 수 있는지?

시 마지막에 나무는 “제자리에 서서 그곳을 먹고, 또 먹히며” 살아간다. 이 구절이 참 좋다. 이 세계에 살아 있다는 건 먹고 먹히는 두 동사를 함께 받아들이는 일. 받으면서 내어주는 일. 상처 난 자리에 다시 껍질을 만들고 새 잎을 내는 나무를 보며 되물어 본다. 훼절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어떤 곳으로 만들고 있는지.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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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2026-09-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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