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꿈의 고향… 끝없이 기억을 헤매는 방랑자여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오경진 기자
수정 2026-09-09 00:54
입력 2026-09-08 20:39
<14>‘고향’과 ‘오뒷세이아’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정지용, ‘고향’ 전문)
우리는 언제 고향을 잃어버릴까. 고향을 뒤로하고 멀리 여행을 떠나왔을 때? 아니다. 고향은 순간 순간 사라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향은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고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도 우리는 순간순간 고향을 떠나고 있다. 아마도 영영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고향은 내 기억 속에서,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고향을 고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애초 상실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지용이 품은 ‘고향’의 분화
실존했든, 마주하든, 추억하든
‘그리던’ 고향의 모습은 사라져
시간·세상에 깎인 상실의 운명정지용은 192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1932년 ‘고향’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달라진 고향 풍경이 퍽 낯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산꽁’(산꿩)은 여전히 알을 품고 ‘뻐꾹’(뻐꾸기)은 여전히 제철에 운다. 시인의 ‘마음’이 문제다. 그의 마음이 고향을 고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고향은 세 갈래로 분화한다. 첫째는 정지용이 ‘경험한’ 그 자체로서 고향이다.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실존했을 그 고향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둘째는 정지용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고향이다. 정지용이 시를 짓는 그 순간에 현존하는 고향은 그러나 그가 경험했던 고향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마지막은 정지용이 ‘추억하는’ 고향이다. 시인이 말하는 ‘그리던 고향’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가 그리는 고향은 과거에 실존했던 그곳이 아니다. 온갖 관념으로 미화된 그리움의 총체다. 이 추억 속의 고향은 현실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 오직 시인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다. 추억하는 존재인 인간은 언제나 외롭다. 나의 추억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모든 것이 주군에게는. 계속 이어지는 지름길들과 닻 내리기 좋은 항구들과 우람한 바위들과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모두. 섰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둘러보았다, 조국 땅을, 그리고 통탄했고, 곧이어 자기 두 넓적다리를 내리쳤다, 두 손바닥으로, 애통해하며 말을 쏟아 냈다. ‘오 이런, 난 다시 어떤 사람들의 땅에 이른 것인가?’”(호메로스, 김헌 옮김, ‘오뒷세이아’ 13권 중에서)
그토록 그리던 이타카에 돌아왔으나 그곳은 그가 알던 이타카가 아니었다. 익숙했던 지름길도, 아름다운 바닷물도, 바위와 나무조차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정녕 이곳이 나의 ‘조국’ 이타카일까. 오디세우스는 절망스러웠다. 이곳이 내가 그리던 이타카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했던 것일까. 이타카가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이타카가 아니라면 지난 10년간 떠돌았던 수많은 섬과 이곳이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난 다시 어떤 사람들의 땅에 이른 것인가?”라며 울부짖는 오디세우스. 이때 그는 아마 알아챘을 것이다. 자신의 모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아니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진실로 그랬다. 이타카는 오디세우스를 환영하지 않았다. 환영은커녕, 또다시 목숨을 건 모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이자 이타카의 왕비 페넬로페에게는 결혼을 요구하는 구혼자가 줄을 섰다. 한참 비어 있던 왕좌를 차지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108명이나 되는 그들을 오디세우스는 혼자 힘으로 처단해야 했다.
호메로스가 담은 ‘복수의 그늘’
낯선 조국서 다시 내려친 칼날
슬픈 영웅에게 맺힌 핏빛 성공
삶 자체가 ‘떠남’의 여정일지도마침내 짜릿한 복수혈전을 성공시키는 오디세우스의 영웅적 면모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통쾌함을 맛본다. 이것으로 오디세우스가 물리적 공간으로서 이타카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떠나왔던, 바다를 떠돌며 그토록 갈망했던 고향은 완전히 산산이 조각났다.
호메로스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다고.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건 오직 나뿐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한다고. 복수가 완성됐을 때 이야기가 끝나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뒷세이아’의 마지막 24권은 그에게 살해당한 구혼자들의 넋이 저승으로 내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오디세우스의 복수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지만, 호메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복수의 ‘그늘’을 보여준 것입니다. 영광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만족이 있으면 동시에 괴로움이 있다는 거죠. 삶에서 성공은 과연 성공으로만 끝날 수 있는가? 오디세우스를 통해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떠남’이 있으면 ‘귀향’이 있다. 여행은 그런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정지용의 시에서, 호메로스의 시에서 우리는 귀향의 불가능성을 확인한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상에 태어난 그 순간 우리의 ‘떠남’은 이미 시작됐다. 돌이킬 수 없다. 그 영원한 방랑의 길 위에서 우리는 죽을 것이다.
오경진 문화체육부 기자·문학평론가
세줄 요약
- 정지용의 ‘고향’, 기억 속 상실의 장소
- 오디세우스의 귀환, 낯선 조국의 재발견
- 귀향의 완성보다 방랑의 지속 강조
2026-09-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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