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3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수정 2006-02-13 00:00
입력 2006-02-13 00:00
제2장 居敬窮理(28)
그러므로 율곡이 퇴계의 서당에 머물러 있었던 2박3일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는 자연 율곡의 불교행적에 대한 고백과 그에 따른 퇴계의 답변이 주화제였을 것이다.
훗날 퇴계가 쓴 글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서적을 읽고 거기에 깊이 중독되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감히 도에 함께 나갈 만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하고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2박3일의 짧은 만남 중에 율곡은 자신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충분히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렇다면 율곡의 고백을 들은 퇴계는 어떤 태도를 보였음일까.
물론 퇴계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있었다.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퇴계가 선조를 위해서 바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선조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한양에 올라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직책을 제수 받고,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도리에 대해서 강론하였던 내용을 문장화한 일종의 제왕학(帝王學)이었다.
이듬해 12월에 퇴계가 죽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공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임금위에 오르자마자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한양으로 올라와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칭병을 하고 올라오지 않자 선조는 직접 붓을 들어 친필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내린다.
“이공,
어진임금은 어진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짐은 갑자기 임금이 되어 어진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소. 그대가 병중이지만 선왕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중국에서 제갈공명은 유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선이 왕위에 오르자 유비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다 갚지 못했으니 새 황제인 유선에게도 은혜를 갚고자 한다, 하였소이다. 그러니 그대도 선왕을 생각하여 짐을 돌봐주어 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기 바라오.”
2006-02-13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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