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관 다리가 최고의 놀이터였지”‘청계천 토박이’ 이순형 서울대 명예교수
수정 2003-07-01 00:00
입력 2003-07-01 00:00
고가도로 철거와 함께 청계천을 서울시민의 품으로 되돌려 주려는 복원공사를 하루 앞둔 30일,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동문회관 ‘함춘원’(含春苑)에서 이순형(李純炯·68) 전 서울대의대 학장을 만났다.그는 인터뷰 도중 어언 반세기가 지나 샛노랗게 바랜 경기고 시절 학교신문 한 쪽을 감회 어린 눈으로 읽어나갔다.2학년 때 문예반원으로 수필란에 실은 ‘청계천송’(淸溪川頌)이란 제목의 글이다.
●‘서울의 하수구' 원흉은 빗나간 시민정신
소년 순형은 이 글을 통해 당시만 해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인근 빈곤층 가정에서 흘려보낸 구정물 등으로 더러워져 ‘서울의 하수구’로 불렸던 청계천의 원흉(?)은 빗나간 시민정신에 있다고 보고 목청껏 비난했다.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을 예로 들며 청계천의 소중함을 일깨운 뒤,아침 일찍 청계천에 나가 보면 나라의 혼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에 (세련됐지만 친밀감을 찾아볼 수 없는) 명동거리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
이 박사는 60년대부터 불모지였던 국내 기생충학에 몸을 던져 후학을 길러낸 뒤 지난해 은퇴해 명예교수로 있다.청계천을 화두로 꺼내자 금방 옛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얘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놨다.낡은 볼펜을 꺼내 청계천 주변 지도까지 그려가며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한 차례 큰 비가 지나간 뒤엔 장대 끝에 줄을 매단 볼품없는 낚싯대로 가물치를 건져 올리기도 했지요.그럴 때면 웃통을 벗어젖힌 아이들이 너나없이 환호성을 질러대고….”
‘서울 토박이회’ 부회장 직함도 갖고 있는 그는 할아버지 세대 이전부터 청계천 근처에 살아온 토박이.본적이 청계천변에 자리한 장교동 56번지다.지금은 없어진 종로구 수하동의 청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박사는 “어릴 적 청계천 수표교 쪽에는 부드러운 모래밭이 멋지게 깔려 나이에 따라 높낮이를 달리 정한 뒤 둔치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즐겼다.”고 회고했다.아치형으로 만들어 모양 자체만으로도 인기를 얻은,현재 삼일빌딩앞 우미관 다리는 변변한 놀이시설이 없던 당시엔 손꼽히는 놀이터였다.주민들이 철봉,역기 등 운동기구를 하나 둘씩 들여놓아 요즘 드라마로 더욱 유명한 김두한도 힘자랑을 했단다.
“나이 든 사람들 중에는 청계천 하면 탁류를 떠올릴 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잠시 피란 떠났다가 1·4후퇴 무렵 서울로 돌아와 다시 바라본 청계천은 글자 그대로 푸르디 푸른 맑은 물이 출렁이고 있어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전쟁 중에는 너나없이 가정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집집마다 청계천변으로 나와 떡이나 부침개를 만들어 팔아 연명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이 박사 자신도 열다섯살이던 9·28수복 때에는 담배,껌을 팔아 돈을 벌었다.아직도 국산 ‘공작’이나 미제 ‘러키 스트라이크’ 등 담배 이름을 잊지 못했다.
●‘나이애가라' 막걸리집의 어원은
전쟁이 끝난 50년대 중반,가난을 벗어날 생각에 서울로 인구가 몰려들면서 청계천 주변에는 판잣집이 늘어 갔다.판자로 얽은 막걸리집을 ‘나이애가라’라고 불렀다.화장실이 없어 취객들이 청계천 둑 위에서 소변을 봤는데 아이들의 눈에는 그 물줄기가 거세게 느껴졌다는 얘기다.
“5월 단오,8월 한가위 때면 장사교 위에서 동네마다 대표를 뽑아 연날리기 대회가 열리곤 했지요.”
중·고교생들이 정동 등 시내 학교로 통학하는 길이었던 청계천 10리 뚝방길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분홍빛 사연을 실어나르는 길이기도 했다.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까 말까 할 정도로 비좁은 길에 학생들이 넘쳐나 남녀끼리 자연스레 어깨가 마주쳤다며 이 박사는 씩 웃었다.
흔히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고향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한 나라의 수도(首都)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타지인들에게 내준 탓이라고 했다.팔도 사람이 모인 서울을 그는 ‘공설운동장’으로 비유한다.한강도 서울의 하천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커서 대부분 사대문 안에서 둥지를 틀었던 서울 사람에게는 ‘고향’ 하면 떠오르는 게 청계천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청계천 복원은 고향 찾아주는 일
“청계천 복원은 서울토박이는 물론 고향을 잃고 살아가기 쉬운 미래 서울시민들에게 고향을 찾아주는 일로 반기지 않을 수 없지요.”
최근 서울토박이회 회원들과 청계천 복원의 성공을 염원하는 홍보 캠페인을 벌이던 중 광교 조흥은행 옆으로 난 뒷골목에서 50여년 전의 여염집 담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향의 흔적을 찾았다는 감격으로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중산층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청계천 쪽에 살면서 상대적으로 외면당해온 북촌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때로는 청계천 주변을 떠나기 싫어했던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다.”는 이 박사.조상 대대로 무교동·수하동·삼각동 등 청계천 주변을 내내 떠나지 못하다가 60년 모두 의학도였던 4형제의 학비 마련 등을 위해 당시 신도시로 개발된 불광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청계천과 약간은 멀어져야만 했다.
“개발에 떠밀려 청계천이 복개될 때는 안타깝기 그지 없었는데….”라며 말끝을 맺지 못하는 이 박사.2년 후에 다시 드러날 청계천의 새 모습을 꿈꾸며 옛 추억에 잠긴 듯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글 송한수기자 onekor@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
2003-07-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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