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기자가 본 종교 만화경] 부시와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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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2-02-18 00:00
입력 2002-02-18 00:00
1857년 간행된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은 상징주의의 선구로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고전이지만,당시엔 적지않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종교와 관련된 근대인의엄숙한 심리를 에로티시즘에 연결한 탓이다.출판 직후 종교와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피소돼 일부 시가 삭제됐고보들레르와 출판사는 벌금형을 받았다.

‘악의 꽃’을 연상시키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지축을 흔들고 있다.정치적 계산이 깔린 수사(修辭)임을 감안하더라도,증폭되는 파장이 간단치 않다.발언직후 종교계가 일제히 항의성명을 낸 데 이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등 기독교 단체들은 19일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서 규탄대회를 연다며 벼르고 있다.‘악의꽃’이 국내에서 수난을 당했다면 ‘악의 축’은 국제적으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 세계는 흔히 ‘한 손에 칼,한 손에 코란’이란 말로 표현된다.이 말은 이슬람의 세계관처럼 통용되지만,실상은 이슬람의 호전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방 세계가 만들어낸 경구다.그런데 얼마전부시 대통령도 참석한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개막식 식전행사에서 ‘한 손에 칼,한 손에 코란’이 읽혀짐은 왜일까.유타주의인디언 원주민들은 6대륙 대표 앞에서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쳤다.한 쪽에선 ‘악의 축’응징의 전운이 일고 있는 시점에 ‘평화의 축’이 강조되는 절묘한 무대였다.

따지고 보면 ‘악의 축’ 발언이 국내 종교계로부터 큰반발을 사는 것도 괜한 일이 아니다.지난해 9·11 테러참사 후 부시 대통령이 보여준 일도양단식의 몰아붙이기는곧바로 당시의 ‘악의 축’,아프간에 대한 보복전쟁으로이어졌다.그때 적지않은 종교학자들은 이 보복전쟁을 ‘기독교 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싸움’으로 규정했다.물론 부시 대통령을 염두에 둔 평가다.

한국의 전통사찰에는 대부분 사천왕문이 있고 그곳에는무시무시한 모습을 한 네 개의 큰 조각상이 들어서 있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네 방위를 맡아 지키는 이 사천왕상의임무는 악한 무리들을 굴복시켜 교화하는 것이다.이 사천왕의 발 밑에는 어김없이악의 상징인 생령좌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그런데 이 생령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무섭기보다는,오히려 불쌍하다.머리에 뿔이 달리고 사악한얼굴표정이 섬뜩한 서구의 악마들과는 사뭇 다르다.어느시인이 지적했듯 악한 마음까지도 하나의 생명체로 보아안쓰럽게 여기는 심상의 발로가 아닐까.부시 미 대통령이방한 때 사천왕상을 보고 갈 수 있었으면….

김성호기자kimus@
2002-02-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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