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지구촌 신익희선생 여행기](2)
수정 2001-02-10 00:00
입력 2001-02-10 00:00
UN군 우방국을 찾아 사의를 표하는 제2의 임무를 위해 낙위(諾威·노르웨이)의 오슬로와 서전(瑞典·스웨덴)을 거쳐 6월12일 정말(丁抹·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뻬이콘(베이컨)을 만드는데 가서 보니까 낳은지 8개월쯤 되는 어린 ‘도야지’를 잡아서 만들었다.목장 주인은 비밀을알려주겠다며 “새끼가 태어난지 2∼3일만에 다른 곳으로 데려가 인공으로 젖을 먹여 기르면 1년에 2번밖에 새끼를 낳지못하는 어미 도야지가 새끼를 3번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1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와서 비행기를 바꿔 타고 화란(和蘭·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헤이그에서는 애국열사 이준(李儁)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묘지 이름이 ‘힐 오브 뉴오크’라고 하니 신상릉(新橡陵)인셈이다. 마침 이역(異域)의 향수를 자아내는 궂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묘 앞에 서서 눈을 감으니 47년 전 선생이 순국하시던 때가 떠올랐다.일본 제국주의의 흉도(凶濤)는 일거에우리나라를 병탄하려 하였다.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우리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다.
선생의 비문은 영문으로 ‘이준 선생은 1858년 한국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서거하다’라고 쓰여 있었다.중간에 한자로 ‘李儁’이라고 표기돼있는데 필적으로 보아 선생의 생전 동지이던 이상설(李相卨)선생의 친필인 것이 분명하다.한시가 떠오른다.
壯志未酬一身輕 宇宙長留萬古名 我來今讀墓前碑 後人不禁追慕情 ‘큰 뜻을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몸을 던졌으니,그 이름이 우주에 오래토록 머물 것이다.내가 지금 와서 묘앞의 비를 읽으니 후세 사람들은 추모의 정을 금하지 못하겠구나.’ 선생의 유골을 파서 본국으로 가져 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이준 선생의 묘가 여기 있는 이유가 알려져야 하기에 말렸다.
20일 룩셈부르크를 떠나서 백이의(白耳義·벨기에)를 거쳐불란서(佛蘭西·프랑스)에 왔다.파리공항에서 전규홍(全奎弘)공사가 맞았다.
개스톤 몬너빌 상원의장은 불란서 식민지인 남미 혼혈에 흑인 계통 신사로 언변과 풍채가 상당한 장년 정치가였다.에드워드 해리오 하원의장은 내가 한국의 사정을 말할 때마다 “트레비용”을 연발하니 그것은 우리말로 “옳거니 과연 그렇지요”라는 말이다.
내 나라 일에 바쁜 나로서 남의 나라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싶지 않으나 이 나라는 나라 일에 성실한 책임자가 적고정부 인사라는 이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국외로 도피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니 이 나라의 전도(前途)가 어렵다는 생각이들었다.
파리의 밤은 주록등홍(酒綠燈紅).술은 푸르고 등불은 붉으며 미려한 부인들이 곱게 단장하고 밤을 낮 삼아 삼삼오오떼를 지어 몰려 다니니 파리는 과연 향락의 도시인 동시에불란서를 좀먹는 죄악의 도시다.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을 수없다.
이즈음 본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통일없는 휴전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과감한 영단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이태리(伊太利·이탈리아) 로마에는 7월2일 도착했다.가톨릭 법황(法皇·교황)의 나라인 바티칸이라는 독립국이 특이하다.인구 1,000여명의 독립국 형태로 있으면서 법황이 황제노릇을 한다. 피우스 법황은 우리나라에 대해 많은관심을갖고 있었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법황은 “한국에 대하여많은 도움을 못 주어 대단히 미안하다.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난 많이 받은 한국은 응당 원조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친절하고 정다운 말을 하였다.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전쟁 전에 법황의 평화 권고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이성적으로처리했다면 수백만 인류를 전화의 불구덩이에 몰아넣지 아니하였을 것이요,좀더 조기강화(早期講和)를 하였어도 그 화를 감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종교를 믿지 아니하고 독재의폭군이던 무솔리니도 법황에게만은 경의를 표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전 세계에 널려있는 가톨릭 교도의 여론을 계산해넣은 정치적 고려가 아닌가 한다.
정리 안동환기자sunstory@
2001-02-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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