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솔잎혹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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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5-19 00:00
입력 1999-05-19 00:00
솔잎혹파리가 지나가고 나면 숲 전체가 잿빛으로 타들어가 처참하기 이를데 없다.그러나 솔잎혹파리 못지 않게 숲이나 산을 휩쓸어가는 무서운 존재가 있다.바로 인간의 손이다.필요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뽑아가고 꺾어가고 주워가는 데에는 계절이 따로 없다.

봄이나 여름에는 산나물 뜯으러 오는 사람들로 산은 몸살을 앓는다.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까지는 그렇다 해도 요즘은 산채관광이라는 상품까지 생겨 산마다 사람들을 풀어 놓으니,산에서 나물 찾아보기란 도심에서 별보기만큼 어려워져 간다는 말도 그리 과장은 아닐 것이다.가을에는 밤이나 도토리때문에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데,그냥 재미삼아 한두 개 줍는 게 아니라나무를 뒤흔들어 덜 여문 것까지 싹쓸이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심지어 인간의 손이란 배고프지 않아도 그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검고 예쁜 돌이 많기로 유명한 어떤 해수욕장에서는 피서객들이 돌을 하도 주머니에넣어가는 바람에 종일 사람이 지키고 서 있어야 할 정도라고 한다.머지 않아 그 해변에서 검은 잔돌을 구경할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흔히 개미나곤충을 지구의 청소부라고 부르지만,인간의 싹쓸이 실력이 이쯤되면 개미들도 두 손 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청소란 싹쓸이가 아니다.있어야 할 것은 제 자리에 남겨두고 없어야 할 것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그것이 제대로 된 청소일 것이다.인간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쓰레기와 폐허뿐이다.있어야 할 것은씨가 마르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한 숲을 보며 나는 솔잎혹파리가 지나간 폐허를 떠올린다.예쁘고 좋은 것은 모두 쓸어다 아랫배와 주머니를 채우기에바쁜 인간의 손,그 부지런함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산나물은 산에서 좀더 자라 씨를 퍼뜨려야 하고,도토리의 얼마쯤은 땅 속에 묻혀 다람쥐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저 남쪽 바닷가의 검은 잔돌들은 파도에 쓸려 차르륵 차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다녀야 한다.거기가 원래 그들의 자리다.

나희덕 시인
1999-05-19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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