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새모색/「카리스마」보다「융합의 리더」찾는다(신지도자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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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5-01-26 00:00
입력 1995-01-26 00:00
21세기의 유럽국가들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프랑스의 한 국제문제연구소는 『민족주의 강화로 21세기가 반드시 장미빛으로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미국의 석학 새뮤얼 헌팅턴은 『앞으로 민족문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민족과 문화에 대한 비전이 미래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떠오를 것이라는 얘기다.
그와 함께 현재 경제적 통합의 중간지점까지 진전된 유럽연합의 앞날을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과의 협조 관계를 부드럽게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자질도 요구된다고 보고 있다.
선택은 국민에게 달렸다.시대 변화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국가지도자상은 늘 바뀌어 왔다.유럽 여러나라 지도자들의 진퇴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지난 58년 드 골장군을 막강한 권한까지 주면서 대통령으로 택했다.그러나 11년 뒤에는 그에게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 대통령직을 그만두게 했다.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난뒤 정치·사회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데다 당시 식민지 알제리에 주둔하던 군부의 쿠데타조짐까지 겹친 위기상황을 맞자 초야에 묻혀 있던 드 골장군을 불렀다.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외교·국방·내치에 방대한 권한을 부여하는 5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주면서 프랑스의 영광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드 골대통령은 카리스마적인 국가경영으로 전반적인 안정기를 이룩하지만 60년대말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는 바람이 불어닥친다.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월남전 참전에 대한 젊은층의 반전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었고 국내적으로 2.7%라는 당시로서는 높은 실업문제와 학교시설 개선문제 해결등이 요구됐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조르주 퐁피두,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등장해 경제적 안정을 이루지만 변화에 대한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던 것같다.81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미테랑 대통령에게 가히 혁명적인 개혁을 기대했다.사회당 정권의 출범에 겁을 먹은 일부 부유층은 해외로 도피했을 정도였다.하지만 이상적인 사회주의 정책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점차 퇴색했고 실패한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경고」는 두번의 좌우 동거정부에서 나타난다.
프랑스는 오는 5월 대통령선거에서 21세기 지도자를 선출할 예정인데 그동안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자크 들로르 전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의 인기가 높았다.이들은 정치인 출신이 아닌 행정관료에다 경제전문가라는 특징을 갖고 있어 프랑스의 미래 지도자상을 읽을수 있게 한다.
사회당 집권 14년에 대한 염증에다 사회당 후보로 유력시되던 들로르위원장의 불출마 선언으로 국민의 선택은 우파로 결정될 것 같다.새로운 지도자의 자질로는 3백만명을 넘어선 실업자 문제 해결책,유럽통합(EU) 비전,외교력의 균형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
프랑스가 비교적 폭넓은 지도자의 변화를 추구했던데 비해 이웃나라 독일은 경제및 통일지도자를 한결같이 요구해왔다고 할수 있다.아데나워 총리(재임 49∼63년)은 패전국이던 서독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케 하는 강력한 지도자로 적합했고 에르하르트 총리(63∼66년)는 경제부흥을 위한 경제전문가로 등장했다.
경제적인 기적을 이룬 독일국민들이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기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한 지도자는 빌리 브란트(66∼74년),헬무트 슈미트(74∼82년),헬무트 콜총리(82년∼)등으로 이어진다.특히 89년 역사적인 통일을 이룬 콜 총리의 신속한 상황판단과 기민성은 새시대의 지도자 덕목으로 지적된다.
콜 총리는 85년 옛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등장해 신데탕트시대를 맞이하자 이를 적극 활용해 89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방독초청으로 2차대전의 남은 숙제를 해결한다.나아가 그는 동서독과 4대전승국간 회담을 통해 독일통일의 열매를 거둔다.
콜 총리는 지난해 10월 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거듭 지지를 받아 16년동안 최장수 총리를 할 수 있게 됐지만 국민이 요구하는 그의 활약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이제는 통일이후 문제해결과 화학적인 통합,경제성장을해야 한다는 쪽이다.
종전이후 영국에 나타난 현상은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저조한 생산력,전국을 마비시킬 수 있는 호전적인 노동조합등 이른바 영국병의 만연이었다.대영제국의 광영은 커녕 유럽내 2류국가로 전락할 상황에서 국민이 요구한 것은 강력한 지도력이었다.
그래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여사가 79년 등장해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노조의 파업에 강력히 대응하는등 개혁조치를 취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대처 총리가 11년만에 다우닝가를 내준 것은 주민세 추진같은 비타협적인 강경함에 국민들이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존 메이저 총리는 합의를 중시하는 온건정책을 펴면서 북아일랜드와의 휴전같은 내치문제로 눈을 돌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이제 유럽은 카리스마에 의한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들이 아닌 합의와 조화를 추구하는 지도자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결국,지도자란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읽고 목표를 설정하며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 그 목표를 달성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파리=박정현특파원>
1995-01-2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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