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유배지문화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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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06-15 00:00
입력 1994-06-15 00:00
유배지는 무엇보다도 왕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험한 뱃길 뿐인 바다로 차단되어 있으면 더욱 좋았다.이른바 「원악지」 혹은 「원악도」가 그것이다.제주도야 말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었다.우리 역사에서 유배지를 말할 때 제주도를 빼 놓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순만 국사편찬위원회 제주도사료조사위원은 이 유배지로서 제주도의 역사와 제주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제주유배인들의 도래와 그 영향」이라는 그의 논문은 17∼18일 제주대에서 열리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회의에서 발표된다.
이 연구에 따르면 제주도를 처음 유형지로 삼은 것은 우리나라가 아닌 14세기 초 원이었다고 한다.고려와 원 연합군은 1273년 제주도에서 항쟁했던 삼별초를 섬멸했다.원은 이어 제주도에 총관부를 두어 1백여년 동안 지배했다.원은 이 기간 이곳을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세력가 등 국내에 두기 곤란한 인물들을 쫓아보내는 장소로 이용했다. 원은 1317년 위왕 아목가를 시작으로 모두 1백70여명을 유배시켰다.제주도 유형은 이후 원을 멸망시킨 명나라도 답습했다.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사람을 제주도에 처음 유배시킨 것은 1343년 고려 충혜왕 때부터이다.그러나 고려 때는 숫자도 많지 않았고 유배 시간도 짧았다고 한다.제주도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형지가 된 것은 조선 이후이며 특히 사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연산군 이후라는 것이다.
제주 유배인들의 유형배경과 죄목은 각양각색이다.사화와 옥사,반란과 모반에 연루된 것을 비롯,상소부도죄,간언부도죄,조정비방 또는 대신탄핵,정책반대,반정에 따른 성토,실정,세자책봉반대,벽서사건,서학사옥,과시부정 등 헤아릴 수 없다.이 가운데 역사책에 나오는 큼지막한 사건으로 유배된 사람만도 2백여명에 이른다.그러니 실제 유배된 사람은 훨씬 많다는 추정이다.
왕족으로는 광해군을 비롯,소현세자의 세 아들,이하전 등이 있고 왕실 친인척으로는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선조의 부마 신익성,장희빈의 오빠 희재 등이 있다.
상신으로는 송시렬 이건명 서지수 등 대신급만도 30여명이며 학자와 문인들은 홍유손 김정 김정희 최익현 안효제 김윤식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보우를 비롯해,정약현의 딸로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의 부인 정란수,권일신,오산학교의 창설자 이승훈 등 종교인도 있었고 내관도 8명이나 된다.
유배형은 1895년 갑오개혁 때 장단법에 의한 형기제로 바뀌기까지 조선시대 5백년 동안 원근법에 의한 거리제가 유지되어 왔다.무기형이었던 셈이다.당대를 대표할 만한 지식인들이었던 유배인들은 이 긴 시간동안 책을 읽거나 시를 지으며 보내기도 했지만 적지않은 시간을 도민들의 자제를 가르치며 보냈다.
특히 홍유손 김정 송시렬 조관빈 최익현 등 석학과 김춘택 김정희 등 문화예술인들이 제주문화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더구나 김윤식 박영효 등의 제주유배는 제주도에 일찍부터 근대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이처럼 오늘날 제주의 문화·사상·정신을 형성하는데 유배인들이 미친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서동철기자>
1994-06-1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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