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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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01-08 00:00
입력 1993-01-08 00:00
◎제임스 본드와 맥가이버의 대결/견구조와 유구조의 미래관계는/가방형에서 보자기형으로 바뀌는 문명/빈틈없는 계획… 합리성의 절정/서구 가방형문화/우연 극대활용… 임기응변 능통/한국 보자기형/「넣기」와 「싸기」/가방은 산업사회의 대표적 상징물/기능성 앞서지만 고정된 하드웨어/보자기는 입체적 자기부피 안가진/가변적인 복합기능의 소프트웨어

□황규호문화부장=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융통성이 있는 유구조가 합리주의 일변도의 견구조보다 더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은 그점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특히 평소의 지론이신 보자기문화와 관련하여 이 문제를 풀어가 보았으면 합니다.

■이어령전문화부장관=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만해도 보자기로 책을 싸가지고 다녔지요.책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그런데 근대화와 함께 점차 이 보자기는 책가방에 밀려 사라지고 맙니다.그러니까 책가방은 산업사회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책보는 전근대의 유물로 생각되었지요.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기억은 가죽으로된 란도셀(등에 메는 책가방을 그렇게 불렀지요)을 처음 메고 학교에 갔었을 때의 그 느낌입니다.

○원초적인 근대체험

□보자기에서 가방으로…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근대체험이 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확실히 보자기보다는 가방이 편리하지요.일일이 싸고 매는 번거로움도 없고 들기도 편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교과서에서 근대를 배운 것보다는 그 교과서를 들고 다니는 방법을 통해서 더 많은 근대의 의미를 배우게 된 것같습니다.(웃음)무명 책보를 버리고 가방을 등에 메었을 때 아이들은 편리성 기능성 그리고 상품성이라는 근대의 마력을 몸에 익히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동시에 책보에서는 볼수 없는 가방의 비극이라는 것도 차차 눈치채게 된 것입니다.책보는 푸르면 그만이지요.책이나 공책을 책상안에 넣으면 한장의 보자기만이 남습니다.그리고 그것은 아무데나 구겨서 넣을 수 있습니다.그런데 가방은 그렇지가 않아요.책이나 도시락을 꺼내도 여전히 가방은 가방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책을 넣을 때나 꺼낼 때나아무 관계없이 그 부피 그 형체 그대로입니다.정말 눈치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지요.

□그러고 보니 정말 가방이야말로 융통성이 없는 견구조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군요.

■어디 그뿐입니까.책가방은 미리 용도에 따라 설계된 공간이므로 얇은 공책을 넣는데와 두꺼운 책을 넣는데가 다르고 필통과 도시락을 넣는데가 따로 칸막이가 되어 있습니다.책보는 모든 물건을 한꺼번에 두루 뭉실로 싸버리면 그만이지만 책가방은 분류하고 구분하고 그 크기를 가려서 정해진 곳에 넣어야 합니다.그러기 때문에 어쩌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참외밭에서 일하던 동리 아저씨가 참외를 따주면 그것을 넣어가지고 올데가 없지요.(웃음)그러나 책보같으면 문제가 없습니다.어떤 우연의 행운이 생기더라도 가방과는 달리 보자기는 둥그런 것도 네모난 것도 그리고 수박이나 술병이나 어떤 형태이든 관계없이 모두 포용할 수가 있습니다.보자기는 가방처럼 칸막이가 없습니다.딱딱한 그리고 입체적인 자기 부피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이것이 바로 포용성과 융통성그리고 가변성으로 이루어진 보자기 특유의 유구조이지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가방을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보자기는 소프트웨어 쪽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요.어떻게 쓰느냐.보자기는 쓰기에 따라 여러가지 기능을 갖게 됩니다.가방은 물건을 넣는 용기로서 고정되어 있지만 보자기는 상황과 쓰는 사람의 욕망에 따라 수시로 그 기능과 목적이 달라집니다.들어 올때에는 쓰고 나갈때에는 싸가지고 가는 것이 바로 도둑의 보자기입니다.(웃음)이렇게 얼굴에 쓰기도 하고 싸기도 하고 가리고 덮고 깔고 매고 펴고 온갖 경우에 복합적으로 쓰입니다.시쳇말로 하면 「멀티」기능이지요.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적 원형은 보자기적인 것이고 서양의 그것은 가방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신지요.

■맞습니다.보자기와 가방의 비교는 서구문화와 동양문화(한국 일본)의 차이와 그 특성을 유효하게 설명해주는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단순한 상징적 모델만이 아니라 실제로 서양의 근대화는 가방의 발명과 사용에서 비롯되었고 한국 일본의 전통문화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보자기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어느나라나 보자기 형태의 도구는 있지만 한국처럼 다양하고 다채롭게 보자기를 개발한 민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그 증거로 보자기의 수집 연구가인 허동화씨는 유럽각지에서 그리고 같은 동양문화권인 일본에서도 보자기 전시회를 열어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사실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한·양복기능의 차이

□그러나 단순히 보자기라는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펼치고 있는 상상력이나 상징성이나 구조적인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물론입니다.문화의 비교에서 촉매어(동사)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보자기에 걸리는 기본적인 술어는 싸다(포)입니다.그리고 가방에 걸리는 그것은 넣다입니다.어떤 물건을 싸느냐 넣느냐의 선택자에 따라서 아주 다른 문화가 형성됩니다.가령 사람의 몸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옷을 몸을 싸는 것으로 생각했느냐 그렇지 않으면 몸을 넣는 것으로 생각했느냐에 따라 의상의 개념이 근본적으로도 달라집니다.양복과 한복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있습니까.양복이 인체를 넣는 가방이라고 한다면 한복은 인간의 몸을 싸는 보자기라고 할수 있지요.한쪽 옷은 넣으려 하였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사람이 입지 않아도 자기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그래서 양복은 걸어놓아야 하지요.그러나 한복은 보자기처럼 싸는 것이기 때문에 벗어놓으면 마치 보따리를 푼 보자기처럼 평면성으로 돌아갑니다.그래서 한복은 거는 옷이 아니라 개켜두는 옷이지요.

□정말 그렇군요.갑주(갑주·갑옷과 투구)같은 것이 바로 인체를 넣는 옷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물건을 꺼내도 형체가 달라지지 않은 가방처럼 갑주는 벗어도 입체적인 자기 형태가 변하지 않습니다.「넣기」와 「싸기」의 두 지향성은 어느 분야 어느 경우에도 선명하게 적용될 것같군요.

■도시도 그렇지요.서양의 도시는 바둑판이나 방사형같은 길거리를 미리 만들어 거기에 집과 사람을 집어넣은 것입니다.그러나 한국이나 일본의 도시를 보면 먼저 사람과 집이 생기고 길거리와 구획이 이들을 보자기처럼 싸지요.아무리 계획도시라고해도 동양의 도시는서양의 그것에 비해 규격성이나 정형석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넣기의 가방문화와 싸기의 보자기문화는 조직론과 같은 추상적인 현상에서 건축물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는데 신발하나만 보아도 가죽구두는 발을 넣으려 한 것이고 우리의 짚신은 발을 싸려고 한데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그런데 조금전에 보자기가 가방에 밀려나는 국민학교 교실에서 근대체험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결국은 「넣기」와 「싸기」두 지향성에서 결국 보자기는 가방에게 패배하고 만 것이지요.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산업화시대에서는 그러했습니다.그러나 앞으로 오는 세기에는 다 그것이 다시 역전되어 「넣기」에서 「싸기」로 모든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지요.내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국민학교 아이들이 책가방을 버리고 책보를 들고다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새로운 형태의 보자기 문화가 생겨난다는 것이지 과거로 복고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새로운 보자기의 문화란 어떤 것입니까.그리고 정말 그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수 있으십니까.

■백화점에 가서 아이들 장난감 가게를 들여다보면 금시 알수 있어요.종래의 장난감은 고정형입니다.비행기라든가 자동차라든가 완성형이지요.그러나 요즈음 장난감은 변신로봇처럼 한가지 장난감이 비행기모양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로 바뀌기도 합니다.단 기능에서 복 기능으로 장난감의 개념이 바뀐 것입니다.장난감은 미래의 현실이 아닙니까.모든 것이 그렇게 변화할 것입니다.

○변신 장난감의 시사

□기업에서는요.현재 어떤 징후가 있습니까.

■탱커나 도크를 예로 듭시다.지금까지의 탱커는 대형이든 소형이든 일정한 용적이 정해져 있습니다.몇t급으로 말입니다.그런데 유가가 오르면 큰 탱커가 유리하고 하락할 때에는 작은 탱커가 효율성이 높다고 합니다.그래서 큰 탱커를 부숴서 소형 탱커를 만들기도 하고 거꾸로 소형을 버리고 큰 탱커로 바꾸는 일이 많았지요.그러나 요즈음에는 상황변화에 적응하여 보자기처럼 커지기도 작아지기도하는 신축성 있는 탱커설계를 연구중이지요.이에따라 독크설계도 큰배도 작은 배도 접안할 수 있도록 다목적 신축성을 지닌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지요.이렇게 모든 정형성을 넘어서 융통성을 주어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할 때 미래 사회에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예거할 수가 없습니다.지금까지 경기장은 노천이냐 옥내냐 하는 이분법에 의해서 설계되었지요.그러나 앞으로는 날이 갤때에는 노천 경기장이 되고 비가 올때에는 옥내경기장으로 형태가 바뀌는 보자기 형 경기장이 출현하게 됩니다.벌써 일본 후쿠오카에 건립중인 도에이 야구 경기장은 그 지붕 돔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가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이것과는 좀 다른 예지만 이탈리아에는 기후와 일광조건에 따라 지붕기와 색깔이 수시로 변하는 최첨단 집을 지은것도 있습니다. □추상적인 조직이론에서도 보자기와 가방의 교체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그래요.전번에 말씀드린 관료조직은 가방식입니다.넣을 것이 있든 없든 용기자체의 틀이 있는 가방처럼 관료조직은 일이 있든 없든 조직자체가 선행합니다.그러나 조직을 보자기 식으로하면 일거리가 있을 때에는 조직이 있고 일거리가 없을 때에는 그 조직도 해체됩니다.뷰로크래시에 대응하는 애드호크래시의 예를 들었는데 바로 후자가 물으면 없어지는 보자기 조직입니다.영화는 8할이 인건비인데 영화조직을 관료조직처럼 했다가는 다 망합니다.영화를 만들때에는 생겨났다가 다 찍으면 해체되어 버리는 이른바 프로듀서식 제작방법이 보자기식 조직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가방같은 조직을 가진 기업은 망하게 될 것이며 보자기 같은 유구조로된 기업은 반드시 흥하게 될 것입니다.

○탄피로 교회종 제작

□산업문명이 가방문화에서 보자기문화로 전향된다면 결국 보자기 문화의 왕국인 한국 또는 일본은 서구사람들보다 더 많은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른바 합리주의로 굳은 카르테시언의 서구의 세계시스템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제임스 본드의 영웅형은 이제 구식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제임스 본드는 사람보다도 그가 들고 다니는 007가방으로 유명하였지요.위기에 대처하는 빈틈없는 계획성 합리적 대비등이 바로 서구 산업문화의 절정을 나타내는 그 가방이지요.

그런데 요즈음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영웅은 어때요.맥가이버는 이미 007가방같은 것을 들고 다니지 않은 것으로 인기가 높습니다.그는 언제나 빈손으로 들어가 임기응변의 변통술로 위기를 벗어나지요.믹사기를 이용하여 전파 방해를 하여 탈출한다거나 권총의 방아쇠를 몽키스파너의 대용물로 이용한다거나….맥가이버는 합리성과 예비성보다는 항상 우연성을 이용합니다.어떤 물건을 본래의 용도와는 달리 응용하는 것으로 새로운 기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맥가이버의 영웅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국인은 합리성보다 임기응변하는 변통술에 능합니다.6·25 전쟁때 포탄의 탄피를 주워다가 교회당 종을 만들어 치고 찌그러진 헬멧을 두레박으로 만들고 맥주깡통이나 드럼통을 응용하여 난로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별의 별 것을 다 만들어 냈습니다.사실 오늘날 한국의 전자기술이나 자동차기술은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 폐품들을 응용하는 특이한 기술에서부터 탄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은 발명보다 개발에 더 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것 역시 보자기 기술이라고 보아도 좋을는지요.

■객관적인 과학기술도 따지고 보면 그 나라의 문화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운드 센서라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여 반응하는 자동제어장치인데 이 기술은 원래 미국에서 월남전때 게릴라들의 야간 기습을 막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지요.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이 군사기술을 맥가이버식으로 엉뚱한 분야에 응용하여 히트 상품을 개발해 냈지요.가령 요람에 재우던 아이가 일어 나 울면 그 소리를 듣고 사운드 센서가 자동으로 요람을 흔들어 주는 베이비 용품을 만들고 또는 코고는 소리를 사운드 센서를 이용해 정정지로 자극을 주어 그 소리를 멈추게 하는 코골기 방지기를 만든 것등이 그렇습니다(웃음).

○밀착형 육아법 중시

□보자기의 발상을 정보화사회에 적용하면 새로운 상품개발은 물론이고 인간관계 경영조직관리등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모든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이것을 넣을 것이냐 쌀 것이냐로 판단하여 지금까지 넣어왔던 것을 싸버리는 발상으로 패러다임을 바뀌어 가면 새로운 지평이 보인다는 것이 내 실제 경험이고 소신입니다.아이를 기르는 것도 그렇지요.아이를 요람이나 유모차에 넣고 끌고 다니는 것은 생명을 넣어기르려는 발상이고 우리처럼 업거나 포대기에 싸서 안고 다니는 것은 아이를 싸서 기르는 발상에서 나온 산물입니다.지금 서양의 육아법에서도 스킨십을 소중히 여기고 있어서 종래의 상자에 격리해서 기르는 것보다 한국의 경우처럼 모자 밀착형 육아법이 바람직 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지요.세계에서 한국만이 요람을 사용하지 않고 애를 기른 유일한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육아법에도 보자기 형과 가방형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람은 가방이고 포대기는 보자기인 셈이군요.아이도 넣느냐 싸느냐에 따라 그 육아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를테면 격리형육아에서 밀착형육아법으로….대담을 해 갈수록 우리의 옛 것속에 바로 21세기의 새로운 길이 있다는 온고지신의 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대담=황규호 문화부장>
1993-01-08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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