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을 보내며/지난해 실패만 한것은 아니다(사설)
수정 1991-12-31 00:00
입력 1991-12-31 00:00
우울하고 답답한 1년이었다.활력넘치고 빛나던 70년대나 착실하게 안정적이었던 80년대의 체험이 다소 들뜬 체질을 만들어온 우리에게 이 긴 불황과,단서를 찾을 길없는 혼미는 견디기에 부담스런 한해였다.
정치적으로 지난 한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의정은 의정대로 기대를 밑도는 실망만 보여주었고 행정 또한 표나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무엇보다도 사회적인 불안요인은 심각한 지경을 만들었다.민생치안이 허망하게 구멍뚫려 있어서 국민학교주변도 주택가도 안전하지 못했고 여전히 인신을 볼모로 하거나 해치며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이 별로 줄지 못했고 갖가지 범죄가 창궐했다.특히 범죄의 질이 지능화되고 신종범죄수단이 개발되기도 했다.그 중에도 지난해에는 범죄적 연고가 없는 불특정의 대상을 상대로 「분풀이식」 폭행이나 잔혹한 범행을 하는 범죄가 늘어났었다.
사회가 타락해가고 도덕적으로 무너지는 속도도 91년에는 좀더 심했던 해였다고 할 수 있다.뇌물로 인한 함정에 빠진 계층이 사회전반을 휘몰고가는 현상을 보였다.국회의원의 뇌물외유를 비롯하여 직위가 상당한 고위공직자가 줄줄이 연루된 증수회 비이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마침내 그 이전의 어떤 비이보다도 우리를 강타한 것은 예술교육기관에 종사하는 대학교수들의 입시불정사건이다.국회의원이나 관이에 대한 뇌물 파동은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예가 있을수 있지만 명문대학의 권위있는 대학교수가 자기대학 학생을 거액으로 거래하며 입시부정을 해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일이다.
우리를 가장 암울하게 만드는 현실은 어둡고 긴 터널을 헤어나지 못하는 경제현실이다.물가는 물가대로 불안하고 제조업에서 수출에 이르기까지 생산은 가라앉고 증권시장은 주저앉았다.개방압력은 굶주린 맹수처럼 대문앞에서 으르렁거리는데 수출마인드는 살아나지 않고 근로의욕은 상실되어간다.과잉으로 불어닥친 민주화욕구와 분수없는 자신감이 남긴 후유증으로 집단이기주의와 사려없는 과소비기질이 사회를 조금씩 더 혼란시킨 결과,이제는 좌절과 실의가 팽배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일이 열거하노라면 이렇게 어둡고 대책이 없는 한해였지만,그렇다고 1991년이 그렇게 한심하고 대책없는 한해였지만은 않다.곰곰이 돌이켜보면 이해처럼 우리에게 중요하고 성과가 많았던 해도 드물다.
국내정치가 불신의 계절병을 면치못했다고는 하지만 민주화라고 하는 거대한 개혁의 물결을 헤치고 탄생한 정부가 그런대로 합의의 정치를 도출해가며 위태한 고비들을 넘기는 슬기도 발휘했고 무엇보다도 지자제의 첫걸음을 힘있게 내디뎠다.
특히 유엔회원국이라는 건국이래의 소망과업을 이루어 북방외교와 함께 우리의 위상을 세계질서안에 전향적이고 확고하게 편입시킨 공은 한민족 유사이래 획기적인 일이었다.
끝이 안보이는 터널속같은 경제사정의 암울한 현실도 「자각」이라고 하는 전기를 마련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아직은 다 탕진되지 않은 자신감과 의욕이 국민적 공감대를 가지고 재점화될 분위기를 무르익히고 있다.
지난 한두해에 걸친 우리의 침체와 혼미는 따지고 보면 충분히 예측되어온 위기이고 불안이다.단순히 사회발전론에 입각한 이론을 근거로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다.성장의 빛이 남긴 그림자이고 민주화 열병이후에 오는 예후증상이다.
사회라는 유기체는 생략이나 설명안되는 지름길을 가지 못한다.
1991년은 건너뛰거나 회피해갈 수 없는 우리의 도정을 적나라하게 우리 앞에 펼쳐보인 영광과 시련의 「실체」를 한눈으로 부감해보게 하는 해였다.
발전의 신화를 창출하는 시대에는 앙분되고 고조된 열기를 추진력의 원동으로 삼기도 한다.그 꿈꾸듯 열에 떠서 보내는 시대로부터 차디찬 현실의 세계로 들어서는 현실의 시대가 우리의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도 응석으로 프리미엄을 요구할 시기가 아니고 내부적으로도 의타심이나 요행을 쫓을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뿌린 만큼 거두고 온당하게 노력하는 사람만이 온당하게 거둬들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진입된 것이다.
그러기 위한 도정으로서 1991년은 소임을 하지 못한 것은 별로 없는 해이기도 하다.정신없이 터져나온 온갖 비이도 어제 오늘 새로 심어진 악덕의 결과이기 보다는 해묵혀가며 자라온 전시대 해악의 타성적인 확대인 경우가 더 많다.이제 더는 지하나 그늘에 숨어서 계속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추하고 흉한 「진상」을 들키게 된 것들이 더욱 많다.
예술교수들의 불정이 노정될때의 모습은 특히 시사한 것이 많다.더는 부정을 덮어두지 않기 위해서 어떤 초월적인 의지가 연출해놓은 드라마 같은 절묘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묵은해가 물러가는 저녁 땅거미질녘같은 지금 우리가 해보아야할 반성과 성찰은 다가오는 해를 맞기 위한 맑고 곧은 정신의 회복이다.92년은 우리민족의 결정적인 운명을 개척해야 할 절박하고 중대한 시기이다.통일의 기틀을 위해 직접 초석을 놓아야 하고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나는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을 보조를 가다듬어야 할 해다.그와 함께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기여해야 할 사명과 직분을 공유해야 할 해이다.자학과 좌절로 낭비할 시간도 없고 유예할 수 있는 여분도 없는 시기다.
남에게 핑계대고,정치에 떠넘기고 계층간에 서로서로 떠넘기며 책임을 모면하려다가는 공멸할 수밖에 없는 매우 절박한 시기이다.1991년을떠나보내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는 일이다.그것만이 1991년을 의미있게 살리는 길이다.
1991-12-3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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