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정치인이 차지한 지역 축제 무대
수정 2026-10-23 00:59
입력 2026-10-23 00:11
임실치즈축제 무대 정치인들뿐
관 주도 지역축제들의 공통점
성과 이룬 군민들이 주인공이어야
지난 8일 음식 축제의 실상을 살피러 제12회 임실N치즈축제에 다녀왔다. 임실치즈는 1960년대 중반 임실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 시작한 일이다.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는 산양 두 마리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해 1967년 임실읍 성가리에 국내 첫 치즈 공장을 세웠다. 1970년 임실역전교회에 부임한 심상봉 목사는 신용협동조합 운동으로 농가의 고리채를 끊고 청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오늘날 임실치즈마을이 누리는 경제적·심리적 자족감은 두 리더가 일군 자립의 정신에서 나왔다. 이제 예순·일흔 줄에 들어선 그 제자들이 고군분투한 결과가 바로 임실치즈다.2015년부터 임실군은 치즈마을 언덕 너머 임실치즈테마파크에서 축제를 열어 왔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최우수 문화관광축제가 되었다. 올해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전국 식품 축제 20개를 처음으로 묶은 ‘K푸드 페스타’에서 금산세계인삼축제에 이어 두 번째 순서에 이름을 올렸다. 수도권 백화점에서도 비싼 임실치즈와 요구르트를 20% 할인하니 판매장은 인산인해였다. 화려한 무대와 판매장은 모두 테마파크에 있었고, 60년 치즈의 역사를 품은 마을은 축제의 중심에서 비켜난 채 그 언덕 너머에 있었다.
정작 평일에도 문을 여는 마을운영위원회 직영 치즈마을 음식점은 축제 첫날임에도 오후 2시에 문이 잠겨 있었다. 운영자에게 전화를 걸어 얇게 썬 치즈 여러 조각을 얹은 치즈육회비빔밥을 맛보았다. 낯선 서양 음식이던 치즈를 제 밥상에 들여온 이 마을 60년의 내력이 그 그릇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일군 마을의 식당은 축제의 바깥에 있었다. 뒷맛이 씁쓸했다. 축제장 곳곳에 지정환 신부의 얼굴은 걸려 있었지만, 심상봉 목사와 그 곁에서 젖소를 키우고 치즈와 요구르트를 생산한 마을 일꾼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정이 없지는 않다. 치즈마을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군수나 군의회 의원은 임실치즈가 치즈마을의 독점이기보다 군민의 공유재이기를 원했다. 임실군은 10년 가까이 이 축제를 군민 전체의 축제로 바꾸려 애썼고, 올해는 처음으로 개막식을 테마파크가 아닌 임실읍 재래시장 옆 대로로 옮겼다. 8일 저녁 6시,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5000여명의 인파에 아연했다. 정말 군민 축제가 된 듯했다.
그러나 개막식은 전북 지역 정치인들의 소개와 인사로 시작되었고, 클라이맥스는 집권 여당 대표의 등장이었다. 문제는 정치인이 왔다는 사실이 아니다. 무대 위에 치즈를 일군 군민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주민은 객석을 채웠고, 무대는 정치인이 차지했다. 치즈가 정녕 군민의 공유재라면, 그 무대야말로 치즈를 만들고 지역 음식을 차려 낸 군민의 몫이어야 했다. 축제장 먹거리 장터를 지킨 것도 12개 읍·면 생활개선회 어머니의 손이었다.
나는 지난 30여년 전국의 음식 축제를 다니며 확인한 사실이 있다. 지역 축제 대부분이 관 주도형이라 개막식은 정치인 소개가 주된 프로그램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수천 명이 모이는 자리는 선거를 앞둔 이들에게 가장 값싼 유세장이다. 지역 언론의 사진 한 장은 치적이 되고, 의전 서열에 따른 내빈 소개는 관행이 되어 누구도 줄이지 못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이 말한 ‘집합적 열광’ 속에서 공동체는 스스로를 확인한다. 축제는 본디 그런 자리다. 그 자리가 표를 확인하는 자리로 바뀐 것이다.
대안은 어렵지 않다. 내빈 소개는 안내 책자로 대신하고, 정치인은 객석에 앉으면 된다. 무대에는 치즈 생산 농민이 서서 임실치즈의 역사를 들려주고, 임실치즈로 만든 음식을 나누면 된다. 축제 기획에도 치즈마을과 읍·면 주민이 처음부터 참여해야 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축제의 주인도 마땅히 주민이다. 지역 축제에 얼굴 내미는 정치인은 자제하라. 그래야 민주공화국의 자치가 바로 선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
2026-10-2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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