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말라던 세상의 벽 넘어”…심장병 아이들, 지리산 노고단에서 꿈을 쏘다
이병문 기자
수정 2026-10-20 14:21
입력 2026-10-20 14:21
폰탄수술 환아 함우진 군 등 143명, 의료진과 함께한 지리산 원정기
부천세종병원, 한라산에서 히말라야, 노고단까지 11년째 산행 동행
“얘야, 무리하면 안 된다. 너무 뛰지 마라.”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난 아이들이 세상에 첫발을 디딜 때 가장 먼저 들려오는 말은 대개 ‘금지와 제한’이었다. 심장이 남들과 조금 다르게 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들은 학교 체육 시간에 운동장 모퉁이에 외롭게 앉아 있거나 또래 친구들과의 활기찬 놀이에서 슬그머니 제외되곤 했다. ‘심장병 아이는 운동을 하면 위험하다’는 세상의 뿌리 깊은 편견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 심장병보다 더 깊은 위축과 두려움의 흉터를 남겼다.
그러나 그 견고한 편견의 벽을 허물고, 아이들에게 “너희도 할 수 있다”며 손을 잡아준 이들이 있다. 붉은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지리산 노고단. 지난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하고 가슴 뭉클한 도전이 펼쳐졌다.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가 주최하고 부천세종병원 등 전국 주요 의료진이 함께한 ‘제11회 세상을 바꾸는 원정대–2026 지리산원정대’가 그 주인공이다.
이번 지리산원정대에는 미취학 아동부터 초·중·고등학생, 성인 환우와 가족, 그리고 이들의 곁을 지키는 의료진과 전문가 등 전국에서 총 143명이 모였다. 10일 아침, 참가자들은 성삼재휴게소를 출발해 험준한 지리산 노고단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참가자들의 이력은 저마다 다채롭고 눈부셨다. 특히 원정대원 중 약 30%는 ‘단심실’ 계열의 복잡 선천성 심장병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우심방과 좌심방, 우심실과 좌심실로 나누어진 정상 심장과 달리 심실이 하나뿐인 단심실 환아들은 생존을 위해 단계적인 ‘폰탄수술’을 받아야만 한다. 수술 후에도 산소포화도와 심장 기능을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하는 고난도 질환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이는 부천세종병원에서 폰탄수술을 받고 자란 함우진 군(장성중 2학년)이었다. 함 군과 원정대의 인연은 무려 11년 전으로 올라간다. 2016년, 미취학 아동이던 함 군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제1회 한라산원정대에 참가해 백록담에 올랐다. 이후 소백산, 태백산, 설악산 등 전국의 산을 묵묵히 올랐고, 급기야 2024년에는 해발 4,130m에 달하는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까지 정복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어느덧 의젓한 중학생으로 자라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 선 함 군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선천성 심장병이 아이들의 미래를 제한할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산증인이었다.
이 감동적인 여정의 시작점에는 아이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함께 울어준 의료진이 있었다. 2015년 환우회 가족여행에서 시작된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올라보자”는 자그마한 아이디어는 부천세종병원 김성호 과장(소아청소년과)과 이창하 진료부원장(소아흉부외과) 등의 결단으로 결실을 보았다.
의료진은 하얀 가운과 청진기를 잠시 내려놓고 등산지팡이를 들었다. 아이들이 산을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산소포화도를 체크하고 옆에서 따뜻한 격려를 건네며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의 동행은 단순한 의료 지원을 넘어 아이들에게 “의사 선생님이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도전해도 된다”는 단단한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원정대 출범부터 11년간 한결같이 환아들의 곁을 지켜온 부천세종병원 김성호 과장에게 뜻깊은 공로패가 전달됐다.
공로패를 품에 안은 김성호 과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가쁜 숨을 내쉬며 산에 오르던 아이가 어느덧 건강한 중학생이 되고, 히말라야 원정까지 다녀오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의료진에게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동이자 특별한 경험입니다. 심장병 치료는 병원 수술실이나 시술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성숙하게 자라나며 자신만의 건강한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진정한 치료입니다.”
김 과장은 덧붙여 보호자들에게도 따뜻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선천성 심장병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술 후 심장 기능도 아이들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무조건 운동을 금지하여 아이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거나, 반대로 준비 없이 무리하게 도전하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담당 의료진과 정밀하게 상담하여 아이의 건강 상태에 맞는 적절한 활동을 찾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흘간의 ‘지리산원정대’ 일정은 단순한 산행에 그치지 않았다. 첫날인 9일에는 ‘우리아기심장알기’ 강연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의 수술과 중재시술, 소아중환자실 관리, 심장 건강을 위한 운동 등에 관한 고급 의료 정보를 보호자들과 공유했다.
마지막 날인 11일에는 부천세종병원 장소익 부장의 강연에 이어, 선천성 심장병을 극복하고 의사가 된 신승건 부산 연제구보건소장, 양산부산대어린이병원 최광호 교수 등이 참여하는 소통 간담회가 열렸다. 환아와 보호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길을 걸어간 선배 환우이자 의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 아이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정표를 가슴에 새겼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안상호 회장은 원정대가 나아갈 궁극적인 지향점을 울림 있게 전했다.
“‘세상을 바꾸는 원정대’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단순히 높고 험한 산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닙니다. 심장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능력이나 미래를 사회가 미리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원하는 꿈을 향해 담대하게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아이들이 흘린 땀방울과 성취감이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커다란 자신감이 되고, 우리 사회에는 심장병에 대한 오랜 편견을 허무는 밑거름이 되기를 절실히 바랍니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노고단 정상까지, 아이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자국은 단순한 산행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이 그어놓은 한계의 선을 넘어서려는 장엄한 도전이었고, 심장의 흉터를 훈장으로 바꾸어 낸 승리의 선언이었다.
부천세종병원을 비롯해 양산부산대어린이병원, 서울대병원 의료진, 서울시립대 스포츠과학과 전문가, 희망철도 재단, 서울대 교수산악회 등 수많은 이들이 보탠 따뜻한 손길 속에 ‘세상을 바꾸는 원정대’는 올해도 성공적으로 11번째 마침표를 찍었다.
정상에 선 아이들의 얼굴에는 가쁜 숨 대신 세상을 품을 듯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심장은 조금 다르게 뛸지언정, 희망을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의 뜨거운 열정은 그 어떤 누구보다 강렬하게 세상을 울리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그들의 거룩한 원정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이병문 의학전문기자
세줄 요약
- 지리산 노고단서 열린 11번째 환우 원정대
- 환아·가족 143명 참여, 의료진이 동행
- 심장병 편견 넘어 가능성 확인한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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