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친일파 글씨와 국중박의 위기

서동철 기자
수정 2026-10-19 02:42
입력 2026-10-19 00:57
미술사 교육 플랫폼 ‘스마트 히스토리’는 최근 세계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교과서로 떠오르고 있다. 이 플랫폼이 강조한 핵심 가치 가운데 ‘증거에 기반한 판단’과 ‘출처와 소장 경위의 검증’,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해석의 한계는 인정한다’가 인상적이다. 대학 미술사학과 신입생이 강의실에서 가장 먼저 듣는 ‘미술사학자의 기본 자세’일 것이다.
내용을 풀어 보면 이렇다. 먼저 작품을 누가 언제 만들고,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주장하려면 양식·문헌·작품 비교 등 증거로 뒷받침해야 한다. 작품 소유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부적절하게 유통된 작품인지 살펴보는 것은 물론 미술사가가 개입해 가치를 상승시키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했다. 작품을 개연성 있게 해석하되, 해석 결과에는 주관이 개입됐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미술사 교재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추사 김정희는 서화를 함께 논하던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를 언급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과 혹독한 세리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안과 세리수 같은 자세’를 누구보다 자주 언급한 사람이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7월 애국지사의 글씨라며 전시했다가 동명이인 친일파의 작품으로 밝혀져 철거한 글씨가 바로 유 관장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소식은 충격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 특히 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미술사학자다. ‘금강안과 혹리수’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진 작품마저 ‘미술사학자의 기본 자세’를 망각하고 봤다는 뜻이다.
박물관 구성원의 반성도 필요하다. 서화 전공을 포함한 학예직 가운데 작품을 보고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미술사의 기본을 모두가 외면했다는 뜻이다. 의구심을 가졌지만 관장의 권위에 도전을 피했던 것이라면 더더욱 미술사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서동철 논설위원
2026-10-1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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