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의 마음 처방] 안녕… ‘피터팬 아빠’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수정 2026-09-11 01:06
입력 2026-09-11 00:20
진료를 하다 보면 세상의 온갖 아픔을 다 만난다. 그중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주할 때마다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아픔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픈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서 본 적이 있다.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패혈증으로 입원을 한 것이다. 그 뒤로 한 달에 한 번, 2주씩 입원하는 일이 1년간 반복됐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실제로 세상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아픔들도 있다. 자폐증이 그렇다. 진료실에서 만난 부모님들은 자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 문장 앞에서 나는 늘 할 말을 잃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 그가 수용소에서 관찰한 것은 뜻밖이었다. 끝까지 버틴 사람은 가장 건강한 사람도, 가장 낙천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절망이란 의미를 잃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로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막막한 질문이 남는다. 중증 자폐 아이를 둔 부모는 대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삶에는 의미가 아니라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 질문에 오래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피터팬 아빠’ 전경철 작가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그는 중증 자폐 아들을 27년간 돌봤다. 지난해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치료보다 아들이 혼자 남았을 때 살아갈 곳을 찾는 데 썼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다른 중증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공동체와 재단 설립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그가 아들과 함께한 27년을 설명한 방식이었다. 다른 부모들은 아이 키우는 기쁨을 5년밖에 누리지 못하지만 자신은 27년을 누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현실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아들의 장애가 가벼워진 것도 아니고 27년의 돌봄이 덜 힘들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끝없는 아픔’이라고만 부르지 않았다. ‘27년 동안 계속된 기쁨’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였다.

전 작가는 지난 5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내게 남긴 가르침은 고통을 참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깊은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발견한 의미는 때론 자기 삶의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의 삶을 지키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진료실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만날 것이다. 그때 쉽게 ‘힘내세요’라고, 쉽게 ‘의미를 찾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무엇을 지켜왔는지, 무엇 때문에 오늘까지 살아왔는지 함께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가끔은 전 작가를 떠올릴 것이다. 스물일곱 해 동안 자라지 않는 피터팬을 품에 안고, 아픔 가득한 자리에 기쁨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였던 사람. 내 마음속 오래 남을 선생님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정엽 광화문숲 수면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미지 확대
정정엽 광화문숲 수면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정엽 광화문숲 수면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6-09-11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