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보고 다퉈도 밥은 챙기네 !… 징글징글하고 따스한 이웃들

최여경 기자
수정 2026-08-21 00:06
입력 2026-08-20 23:55
찌니주의보/정지아 지음/창비/232쪽/1만 6800원
평균 연령 일흔여덟의 시골 마을‘레지’ 오해받는 서울서 온 두 찌니
‘레즈’ 이해 못해도 품는 어르신들
창비 제공
‘찌니들’은 혜진과 성진을 부르는 동네 애칭이다. 평균 연령 일흔여덟, 노쇠한 마을 어르신들이 편리하게 붙였다. 어느날 아침,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 앞에서 동네 실세를 자처하는 윤 선생이 어마어마한 폭로를 해버렸다. 사실 서울에서 내려온 그 두 찌니는 ‘레지’다!
촌로들에게 레지란 다방에서 차를 나르던 옛 직업이다. ‘찌니들이 방안퉁수라는 건 이 동네 개들도 다 아는디 레지는 먼 놈의 레지! …아따! 고런 레지가 아니란 말이네! 고런 레지가 아니먼 요런 레지도 있당가? 글먼 갸들은 먼 레진디? …고것들이 긍게, 즈그끼리 좋아한다, 그 말이여.’(23쪽)
정지아(61)의 신작 ‘찌니주의보’는 이렇게 오해 한 자락에서 비롯된 폭소로 문을 연다. 마을 사람들은 레지가 껄끄럽다. 스무 살도 안 된 레지에 한씨 부자가 얽혀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민망해진 한씨 큰아들이 밤도망을 쳤다. ‘그 레지’가 아닌 게 다행이긴 한데 이번 건은 또 다른 문제다. 여자끼리 한집에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오랜 믿음 앞에서 찌니들은 쫓아내야 할 존재가 된다. 세상 눈초리를 피해 이 마을까지 흘러든 두 사람은 다시 빗장을 걸었다.
판을 흔드는 것은 이장의 베트남인 아내 쑤언이다. 스무 해 전 시집와 줄곧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찌니들의 처지는 남의 일일 수 없다. 쑤언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서, 찌니들은 여자를 좋아해서 사람들의 냉랭한 시선을 받고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사람을 죽였느냐 도둑질을 했느냐고 쏘아붙이는 쑤언 앞에서 마을 여론은 갈피를 잃는다.
찌니들을 당황하게 하는 건 완고한 시선보다 노인들의 앞뒤 안 맞는 손길이다. 앓는 몸으로 남편 밥상부터 차려줘야 했던 한씨댁이 지긋지긋한 남편을 벗어나 찾은 곳은 찌니들 집이다. 그 와중에 찌니들 줄 김치통을 들고 왔다. “느그가 난 년들이다, 난 년들이여. 한 년이 아프먼 딴 년이 밥이라도 채릴 것 아니냐.”(225쪽) 찌니들은 이해를 받은 것인지, 기분이 오묘해진다.
반려닭을 유모차에 태운 도시 친구 기희가 나타났을 때도 그렇다. 닭이 하도 시끄러워 시골에 맡기려고 찾아온 것인데, 기겁한 찌니들과 달리 달구 할매가 오히려 포용한다. 물론 다달이 일종의 ‘보육료’를 줘야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던 윤 선생이 살 곳마저 잃을 처지에 놓이자 사람들은 고개를 젓다가도 끝내 등을 돌리지는 못한다. 정지아는 1990년 빨치산이던 부모의 생애를 옮긴 ‘빨치산의 딸’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작가는 오래도록 그 이름표를 떼어내려 애썼다. 2011년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려 고향인 전남광주 구례군으로 간 지 11년 후 다시 ‘전직 빨치산’인 아버지의 서사를 따라가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내놨다. 이념 너머의 한 사람을 발견하게 했던 그 소설로부터 네 해가 지나 마을 전체를 무대로 편견 너머의 이웃을 조망한다.
작가는 자신을 “잔뜩 날 선 고슴도치”에 견주며 그 가시를 뭉툭하게 만든 것이 구례 노인들이라고 적었다. 좋고 싫음이 전통이거나 학습된 관념이라면 일상은 구체다. 몸을 써서 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 앞에서 관념은 번번이 진다. 한해 농사를 헛걸음으로 만드는 태풍조차 원망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이니, 외국인 며느리든 레즈비언이든 끝내 품고야 마는 것이다. “야! 달구 할매가 너네보다 더 깨어 있더라 얘. 청소만 잘하라던데? 이 닭 차별주의자들아.”(192쪽) 반려닭을 키우는 친구가 찌니들에게 한 말에서 작가의 심정이 투영되는 까닭이다.
소설은 편견이 말끔히 씻기는 화해를 향해 가지 않는다. 완전히 이해해야만 곁에 남는 것은 아니라고, 흉보고 다투면서도 아픈 사람 밥은 챙기는 시간이 어떤 대의보다 질기다고 소설은 말한다. 엉뚱한 상황과 구수한 남도 입말이 섞인 노인들의 오해에 피식 웃다가 끝내 사람이 그리워지는, 매콤하지만 따뜻한 시골 풍경이다.
최여경 선임기자
세줄 요약
- 레즈비언 오해로 시작한 시골 마을 소동
- 수군대도 밥은 챙기는 노인들의 손길
- 외국인 며느리와 반려닭까지 품는 연대
2026-08-2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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