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빚/최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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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1-11-05 01:59
입력 2021-11-0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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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최동은

백일홍이 피었네요
이 백일홍은 언제 피었죠
백만 원을 빌린 마음처럼 요렇게 빨갛게
백일홍백일홍백만원백만원
그러니까 백만 원이 백일홍처럼 들리네요

빚은 한 번에 늘어난 게 아니죠
꽃이 피듯 서서히 피어나죠
이자도 처음부터 많아진 게 아니구요

백일홍 백 송이도 한꺼번에 피었다 지지 않죠

한 송이가 지면 한 송이가 오고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오고
분홍색이 가면 하얀색이 오고 파란색이 가면 자주색이 오고
그 많은 백일홍이 잘못이 없듯 백만 원도 잘못이 없죠

그저 꽃잎을 몇 장 빌린 것뿐이죠
밤새워 백만 원을 세듯
한 잎 두 잎 세면 셀수록 피어나는 게 이자죠
그러니까 이자는 생각하지 마세요
저기 봐요

폭발하듯 꽃들이 피고 있잖아요
꽃망울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마음이 아픕니다. 백일홍과 백만 원,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데 둘은 한 시 속에 어울렸습니다. 삶과 빚은 동일한 의미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인간은 빚을 지게 되어 있지요. 뭐 하며 살지? 어떻게 살지? 어떤 삶이 의미 있지? 이 의문들은 빚에 다름 아닙니다. 빌 게이츠의 자녀로 태어난들 왜 빚이 없겠는지요. 많은 자산을 물려받았으니 어떻게 써야 하는지 큰 빚을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백일홍이 잘못이 없듯 빌린 백만 원도 잘못이 없습니다. 울지 마세요, 백일홍은 내년에도 피어요. 남행길에 연락 주시면 매생이 굴국밥 한 그릇 대접하리다.

곽재구 시인
2021-11-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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