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754)-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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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6-12-13 00:00
입력 2006-12-13 00:00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11)


둥근 반원 형태로 만들어진 수수교(洙水橋) 밑으로는 그러나 흐르는 물이 거의 없었다. 원래 물 이름 수(洙)자가 나온 것은 공자의 고향을 흐르는 수수(洙水)라는 강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자가 생전에 수수와 사수(泗水) 강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데서 수사학(洙泗學)이란 학통이 생겨났었는데, 그러나 강물이 끊겼기 때문일까,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거의 없었고 대신 그 위로 알이 굵어진 싸라기눈만이 부스러진 쌀알처럼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용도(甬道)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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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을 참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해방군처럼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행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당묘문( 墓門)이 나타났다. 당묘문은 옛날부터 제사를 지낼 때 제주들이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제물을 마련하기도 하던 곳. 실질적으로 공자의 묘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당묘문을 나서자 용도 양편에 네 개의 석조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것은 화표(華表)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주였다. 망주(望柱)라고도 불리는 이 돌기둥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천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시끌벅적하게 낙천적으로 웃으며 극락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화표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 다음의 석조물은 문표(文豹). 표범모양으로 생긴 이 석조물은 용맹과 충성을 상징하는 석상이며, 세 번째 석조물은 괴수모양의 녹단( 端). 상제의 마차를 끌던 동물로 하루에 1만 8000여 리를 달리고, 온갖 말을 다 알고, 모든 일을 다 안다는 전지전능의 정명(精明)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며, 마지막 네 번째 석조물은 옹중(翁仲). 유일하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으로 일찍이 진(秦)나라의 장수로,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맹위를 떨쳤다는 완옹중(阮翁仲)을 가리키는 석상이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을 구축하였다고는 하지만 흉노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던 진시황은 키가 20척이나 되고, 힘은 수백 명을 당할 정도의 남해의 거인 완옹중을 발탁하여 오랑캐를 물리쳤던 데서 비롯된 이 석상은 ‘돌하르방’으로 변형이 되어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도 수호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용도가 끝나자 향전(享殿)이 나타났다. 이곳은 조상들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향당(享堂).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동한(東漢)시대 때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계속 중수를 거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용도에 세워진 네 개의 석상들도 모두 송나라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석조물인 것이다.

향전을 돌아가자 해정(楷亭)이 나타났다.

정자 안 비석에는 오래된 해수(楷樹)가 조각되어 있고, 정자 곁에는 말라죽은 늙은 나무가 한 그루 남아있었다.

원래 자공(子貢)이 이곳에 움막을 짓고 시묘를 할 때 심은 해나무로 이로 인해 공목(孔木)이라고도 불리던 나무였다.

이를 기념하듯 정자 앞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子貢手植楷”
2006-12-1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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