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찾기’ 삽화 유기훈씨 성공기
나길회 기자
수정 2006-11-30 00:00
입력 2006-11-30 00:00
30년 전 한 초등학생이 ‘20년 후의 내 모습’이라는 주제로 수업시간에 발표했던 글이다. 반 전체가 웃음바다가 됐지만 소년은 꿈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산문집 ‘연탄길’로 유명한 이철환(45)씨의 신작 ‘곰보빵’ ‘보물찾기’의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 유기훈(38)씨 얘기다.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빚쟁이가 학교까지 찾아올 정도라 미술 공부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유씨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전역 후 벌인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고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중학생이었던 여동생마저 공장에 다닐 만큼 힘들었다. 양파 장사를 하면서 대입 검정고시를 치렀지만 미술학원은 꿈도 못 꿨다. 당시 일반 입시학원 종합반 학원비는 6만원 정도였지만 미술학원은 20만원 안팎이었다.
그래도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장사해서 번 돈을 쪼개 데생 연습용 아그리파 석고상을 샀다.“미대는 말 그대로 꿈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면 늘 데생 연습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작은아버지가 군대 후배인 이은우(50·고도미술학원장)씨를 소개했다. 당시 서울 논현동에서 막 미술 입시학원을 시작한 이씨는 학원비를 5만원만 받기로 하고 유씨를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당시 학원비는 작은아버지가 내주셨는데 이 선생님은 매월 그걸 저한테 재료비며 다른 입시학원 단과비 등록에 쓰라고 돌려주셨습니다.”
이씨는 금전적인 도움 외에 시간이 날 때마다 유씨를 불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홀로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무료로 미술을 가르치고 다른 공부 학비까지 대줬다. 그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내 유명 의류업체 디자인실장도 있다.1년 넘게 이씨의 도움을 받은 유씨는 홍익대 미대에 합격했다.
지난 28일 유씨는 이 원장을 찾았다. 함께 도움 받았던 친구와 5년 전 찾은 이후로 처음이었다.5년전 그때는 자기 그림을 들고 출판사를 전전하며 일감을 달라고 통사정 하던 시절.‘다음에는 꼭 좋은 모습으로 뵈어야지.’라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선생님은 제자를 보며 “이제 네가 길을 찾았구나.”라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학원이라는 게 영리를 추구하는 곳이긴 하지만 교육이 먼저라는 생각을 실천한 것밖에 없다.”며 말을 아꼈다.
“선생님이 아니셨다면 30년 전 미술가를 꿈꾸던 소년은 지금도 양파를 팔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작은 도움일지라도 받는 사람에게는 그게 전부가 될 수 있다. 그 소중함은 유씨의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2006-11-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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