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 바라보는 8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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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01-07 00:00
입력 2005-01-07 00:00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한국인 평균수명은 남자 73.4세, 여자 80.4세. 며칠전엔 세계적 비누회사의 새 모델로 96세 할머니가 발탁됐다는 뉴스가 외신란을 장식했다. 바야흐로 본격 노년사회를 살고 있음이다.

‘장수시대’ 발빠른 기획 눈길

황금가지에서 펴낸 소설집 ‘소설, 노년을 말하다’(김윤식·김미현 엮음)는 그런 맥락에서 발빠른 기획이 눈길을 붙들어매는 책이다.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국내 현역작가 8명이 노년 소재의 단편을 각각 한편씩 써 묶었다.8편의 신작 단편들은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외피를 둘러쓴, 노년사회를 향한 작가 저마다의 ‘발언’인 셈이다.

소설집에 참여한 이는 한승원(66) 홍상화(65) 이청해(57) 한정희(55) 이순원(48) 하성란(38) 한수영(38) 이명랑(32).‘늙음’이라는 텅빈 거푸집 같은 기호 쪽으로 여덟 개의 시선들이 일제히 쏠려 있다.

늙음의 현현(顯現)이 에누리없이 까발려진 작품은 하성란의 ‘712호 환자’다.30대 후반에 맹장염 수술 도중의 마취사고로 21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온 남자가 주인공. 어느날 깨어보니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버린 남자는 ‘현재의 몸’으로 ‘과거의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늙음이 싸목싸목 기척을 내며 오는 게 아니라 삽시간에 다가오는 것이란 은유가 직설적인 설정이다.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신체적 변화를 발견하고 당혹해하는 대목들은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오촌 당숙뻘쯤 되는 노인의 얼굴”이었다가 “얇고 흰 머리카락이 실오라기처럼 환풍기 바람에도 날린다.”거나 “수분을 잃은 살갗에는 하얗게 살비듬이 일어 옷을 갈아입을 때면 먼지처럼 날린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노인문제를 독자들 사유공간으로

하성란의 주인공이 노년의 좌표를 인정하지 못해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현재를 치열하게 긍정하는 캐릭터도 있다. 한수영의 ‘벽’에 등장하는 칠순의 아버지에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빚을 갚고 집을 고치는 이상한 벽(癖)이 있다. 노인은 빚을 갚거나 집을 다 고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승원의 ‘태양의 집’에 나오는 노인은 손자를 통해 생을 확장시키려는 순수한 열망을 가졌다. 빚에 몰린 사위 때문에 외손자를 떠맡게 된 71세의 노인은 허름한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게 ‘태양의 집’이란 현판을 단다. 어린 손자의 기사회생을 바라며 마치 제의처럼 현판을 단 노인, 거기에다 작가는 유년시절 아버지보다 더 짙은 그늘이 돼주었던 할아버지의 정을 오버랩시킨다.



작가 개개인의 색채를 음미하게 하는 소설은 아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노인문제를 소설독자들의 사유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선의(善意)가 돋보이는 공모(共謀)의 소설집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5-01-0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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