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 「국경」/김영현 「풋사랑」(문학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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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3-10-20 00:00
입력 1993-10-20 00:00
◎민중적 세계관·탄탄한 묘사력 탁월/국경/함경도 방언·농민생활 생생히 재현/풋사랑/소설을 시적정서 자리로 이동시켜

이 달의 문학평은 김남일의 「국경」(1부)과 김영현의 「풋사랑」이 있어서 무척 즐겁다.질척거리는 시궁창 속을 헤매다가 맑은 샘물을 만난 듯,산뜻한 산들바람을 만난듯한 느낌이 반갑고 상쾌하다.「청년일기」의 작가 김남일이 오랫동안의 산고끝에 마침내 발표한 「국경」에는 과연 만만치 않은 공력이 배어 있다.작가는 우리를 1920년대말에서 30년대 초의 함흥지방으로 안내한다.그 안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과 함흥지방의 적색농조 운동,질소비료공장의 제네스트가 펼쳐진다(또 그 얘기? 왠 사회주의? 하고 지레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작가 스스로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소설로 재현한다는 것은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닌 다음에야,난감한 정도를 넘어서 위험한 일이기조차 하다.상상력의 무한정한 자유운동과 그것을 끊임없이 억누르는 사실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 위험은 모든 역사소설이 피할수 없는 위험이기도 하지만,또한 역량있고 야심있는 작가라면 기꺼이 대결하고픈 위험이기도 하다.「임꺽정」,「토지」,「장길산」,「태백산맥」이 그러했고 그 작가들이 그러했다.그러나 「토지」나 「태백산맥」은 말할 것도 없고 「임꺽정」마저도 작가 당대의 언어와 생활체험이 창작의 긴요한 자산이 되었던 것이었다.김남일은 위의 작가들에 비하면 거의 완벽하게 무의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한다.그런만큼 야심과는 달리 소설이 무미건조한 다큐멘터리나 과거사의 단순한 발굴­복원으로 끝날 위험성이 컸다는 말이다.

그 위험을 거뜬히 넘어서게 한 것은 이 소설 속에서 풍요롭고 다채롭게 재현된 함경도 지방의 생활상이다.절묘한 운율과 뚝심이 어우러지는 함경도 방언의 생생한 재현과 농민 생활묘사의 구체성은 이 소설이 지닌 최대의 미덕이며,무릇 소설의 성패가 바로 그 디테일의 진실성과 구체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작가를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작가이게끔 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그점에서 김남일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역량을 보여주었다.디테일의 풍부함에 비추어 서사적 골격이 좀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이제 1부만이 완결된 시점에서는 성급한 속단일수도 있겠다.김남일은 우리 민족문학이 미처 캐내지 못한 광맥을 잡았다.그의 탄탄한 묘사력과 민중적 세계관은 이 광맥을 90년대 민족문학의 새로운 보고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김영현의 「풋사랑」은 80년대 청년들의 이야기이다.소재로만 보면 새로울 것도 없다.그러나 이 첫 장편에서 김영현은 80년대가 낳은 작가로 그를 일컫게 했던 「김영현적인 것」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끔찍한 리얼리티」를 차마 보아내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소설을 차가운 산문성의 공간이 아니라 시적정서의 자리로 이동시키는 한편,세상 바깥의 어디로도 차마 나가지 못하는 그의 정신은 소설의 인물들을 이세상 한복판 그 격류 속에 집어넣고 마구 휘젓는다.내가 일찍이 다른 글에서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했던 그것은 김영현의 힘이기도 하고 또한 굴레이기도 하지만,어찌하랴 그것이 우리 시대의 숨길 수 없는 모습이기도한 것을.<김철 문학평론가>
1993-10-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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