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지하철, 스타트업, 하이라인에 폭소…미국 무기고에 울려 퍼진 한국어 ‘벚꽃동산’

최여경 기자
수정 2026-09-20 18:01
입력 2026-09-20 16:29
세줄 요약
- 체호프 ‘벚꽃동산’, 서울 재벌가로 옮긴 북미 초연
- 뉴욕 지하철·베이글 농담에 현지 관객 폭소
- 전도연·박해수 연기 호평, 전석 매진과 기립박수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웨이드 톰슨 드릴홀에 한국어 대사가 울려 퍼졌다. 19세기 무기고로 지어진 이 거대한 홀에 간이 객석 1200석이 들어섰고, 뉴욕을 겨냥한 농담이 나올 때마다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오페라가 아닌 이상 자막을 읽을 일이 거의 없던 영미권 관객들은 한국 연극에서 자막을 따라 읽으면서도 대사의 속도감과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 사이먼 스톤(42) 연출이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마지막 희곡을 오늘의 서울로 옮긴 ‘벚꽃동산’은 북미 초연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스톤은 1904년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 가문을 오늘의 한국 재벌가로 옮겼다. 영지를 잃는 여지주 라넵스카야는 가족 기업이 기우는 줄도 모르는 3세 송도영(전도연 분),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그 땅을 사들이는 신흥 자본가 로파힌은 운전기사의 아들로 자라 자수성가한 사업가 황두식(박해수)이 됐다. 현실 감각 없는 오빠 가예프는 골프 스윙과 지하실에서 찾아낸 LP 턴테이블에 마음을 쓰는 송재영(손상규), 수양딸 바랴는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홀로 위기를 붙들고 있는 강현숙(최희서), 막내딸 아냐는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다 돌아온 강해나(이지혜)다. 라넵스키 가문에 돈을 빌리러 오는 몰락한 지주 피시크는 김영호(유병훈)로 옮겨 시대의 종말을 드러낸다.
극의 상징인 벚꽃동산 대신 아버지가 딸에게 생일 선물로 지어준 집이 무대에 올라섰다. 건축 디자이너 사울 킴(32)이 디자인한 2층짜리 유리집은 서울과 부산,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에서는 하얀 배경의 무대에 놓였지만 뉴욕에선 검은 배경 앞에 섬처럼 자리했다. 보통 프로시니엄 무대는 객석과 1m 이상 높이 차이가 있지만 파크 애비뉴 아모리는 평지라, 유리집 지면과 객석 1열 바닥이 같은 높이에서 객석 앞쪽은 1층, 중간은 2층, 뒤쪽은 옥상과 눈높이가 맞는다. 관객은 집을 올려다보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는 셈이다.
스톤은 라넵스카야가 집을 떠나 생활했던 프랑스 파리를 뉴욕으로 바꿨다. 아들을 잃고 10년을 뉴욕에서 보낸 도영이 “거기서는 섹스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얘기해, 거의 국민 스포츠라고나 할까”라고 말할 때 객석에선 첫 폭소가 터졌다. 황두식에게 그 시절을 털어놓으며 “알코올 중독자로 살기 딱 좋은 도시”라거나 송재영에게 “나도 뉴욕에 있을 때 지하철 타고 다녔어. 거기선 다 그러고 살아. 기사 데리고 다니는 거 안 멋있잖아”라고 말할 때도 객석이 크게 웃었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지하철, 베이글, 하이라인처럼 뉴욕을 상징하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은 크고 작게 웃었다. 어찌 보면 비아냥 같지만 관객들과 현지 비평은 이를 현실 유머로 받아들였다. 체호프의 희곡을 잘 알고 있다는 엘리나는 “가장 대중적인 희곡을 한국 현실로 각색해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면서 “자막으로 농담을 접해도 배우 연기와 상황이 접목되면서 매우 유쾌했다”고 말했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카린은 “뉴욕 조크가 정말 정확하다”고 했고, 클로이는 “공간을 쓰는 방식이 매우 역동적이라 흥미로웠다”고 평가했다.
현지 비평도 웃음을 먼저 이야기했다. 뉴욕스테이지리뷰의 멜리사 로즈 버나도는 18일자에 “이만큼 웃긴 ‘벚꽃동산’이 있었느냐”며 “웃긴 건 어떤 언어로도 웃기다”고 썼다. 시어터마니아의 데이비드 고든은 “전도연은 몇 마디로 무모함과 신중함을 오가고, 손상규는 매우 껴안아주고 싶은 인물이다. 박해수는 초반의 다정함을 빠르게 벗고 사나운 권위를 드러낸다”며 연기를 호평했다.
다만 자막을 봐야하는 터라 웃음에는 시차가 있었다. 클로이는 “자막은 아주 선명하지만 연기와 함께 한눈에 담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고 했다. 비평도 자막에 대해서는 “누가 말하는지 표시가 없고 너무 빨리 지나가 초반 시선을 빼앗는다”(리프킨), “접근하기 쉬웠다”(버나도)고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이 작품이 가닿은 이유를 스톤은 개막 다음날인 17일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은 한국을 일본과 비교하는 실수를 자주 하지만 기질을 보면 러시아와 훨씬 가깝다”면서 “러시아인들이 역사 내내 미래와 정체성을 두고 불안해했듯 한국인들도 ‘우리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고 진단했다.
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체호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있었고, 한국에선 1980년대부터 거리에서 시위를 하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점도 짚었다. 서구에서라면 심드렁하게 들릴 혁명이라는 말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몰락한 귀족을 재벌 3세로 옮긴 치환이 관념적 유희에 그치지 않은 이유다.
배우에 대해서는 우스꽝스러워질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함과 감정의 절대성을 미덕으로 꼽았다. 스톤은 “정직한 진실로 향하는 여정은 웃음으로 시작해 비극의 계곡에 떨어졌다가 다시 웃음으로 돌아온다”면서 배우들이 희극과 비극 사이를 힘들이지 않고 오간다고 평가했다.
집이 팔리고 가족이 흩어진 뒤 도영이 다시 뉴욕으로 떠나며 공연이 끝나자 객석 곳곳에서 관객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첫 공연 후 전도연은 “기립박수를 받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해수는 “작품 초반에는 자막을 보느라 살짝 낯설어하던 관객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함께 깊이 공감해주는 게 느껴졌다”고 했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해 2024년 6월 서울에서 초연한 ‘벚꽃동산’은 이번 뉴욕 공연으로 2년 3개월의 여정을 끝낸다. 26일까지 11회 예정된 뉴욕 공연은 전석이 매진됐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뉴욕 최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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