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적·다혈질… 호된 질책·따뜻한 위로 교차
수정 2009-02-10 01:15
입력 2009-02-10 00:00
●호로자식·젖비린내… 거친 표현 많아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1757~1824년)에 대해서는 “호로자식”이라고 혹평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조도 자신의 성품이 유별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797년 11월24일 아침에 보낸 편지에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라고 썼다. 국정 전반에 대한 불만도 수시로 토로했다. “나는 시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을 치솟게 만들 뿐이다. ”
●“찢든지 세초하라” 꼼꼼함 엿보여
뛰어난 문장가이자 문필가인 정조는 비밀편지에선 일상에서 사용하는 속어와 속담, 비속어도 자주 썼다.
1797년 4월11일에 보낸 편지 한 구절에는 ‘뒤쥭박쥭(뒤죽박죽)’이란 한글이 등장한다. 수차례에 걸쳐 철저한 비밀유지를 당부하는 대목에선 의외로 꼼꼼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든지 하라.”고 당부했다.
편지는 주로 정치와 국정운영에 관한 정보와 의견들로 채워졌으나 단순한 안부와 정담을 나누는 내용도 일부 있다. 1799년 10월1일에 보낸 편지는 ‘300장(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는데.”라며 심환지의 아들을 과거시험에 붙이지 못해 아쉬워하며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찰첩의 종이와 형식도 당대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듬이질하여 반들반들하게 만든 고급 종이가 대부분이지만 저급으로 취급되는 피지(皮紙)도 사용된 점은 정조의 검소한 생활태도를 엿보게 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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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벽파와 시파로 재편된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하다고 주장한 반면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가 즉위한 뒤 벽파는 왕실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심환지(1730~1802년)는 철저한 노론계 인물로 벽파의 영수였다. 따라서 ‘정조 독살설’이 나돌 때면 그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독살을 방관한 인물로 치부하곤 했다. 그런 만큼 정조 치하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고는 하나 정조와 하루에도 몇차례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정 현안을 일일이 조율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정조는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자기 뜻대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환지는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신유박해를 일으켜 시파를 탄압했다.
2009-02-1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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