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가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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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수정 2024-04-12 00:10
입력 2024-04-1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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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편으로 없던 길이 났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샛길이다. 지난겨울쯤부터였나. 멀쩡한 길을 놔두고 아파트 화단 귀퉁이를 뭉개는 발길들이 보였다. 조금 돌아가면 될 것을 저러나, 마뜩잖았더랬다.

그러기를 몇 달째. 어쭙잖은 발길, 조심스러운 발자국, 시원한 발소리. 내가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찍히고 발소리가 쌓였을까. 엉거주춤했던 길이 말쑥한 새 길이 됐다. 짧고 꼬부라졌어도 잘 다져진 흙길 양쪽으로 오종종 봄꽃들이 자리잡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길이었다는 듯, 민들레꽃은 백년째 그 자리에서 또 피었다는 듯이.

나도 그 길을 걷는다. 발아래로 루쉰의 오래된 문장이 구른다. 땅 위에는 본디 길이 없었으며 발길이 쌓여 길이 된다는. 사람이 품는 희망도 땅 위의 길과 같다는.

서툰 발길로 길 없는 길의 모퉁이를 돌다 어느 저녁 문득 이마에 부딪치는 것. 꿈을 꾸는 일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마음에 샛길 한 줄 내고 날마다 발자국을 모으는 일인지 모른다.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2024-04-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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