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예수회와 한국/서동철 논설위원
수정 2013-03-16 00:16
입력 2013-03-16 00:00
아시아 선교는 예수회 창설 멤버의 한 사람으로 스페인 바스크 출신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중심에 있다. 그는 인도와 일본 전교에 평생을 바쳐 포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하비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은 일본과 스페인은 물론 동양 선교의 전진기지였던 말레이시아의 말라카, 중국 선교의 교두보인 상하이와 마카오에도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도 충북 수안보에 1963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 지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명도 하비에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비에르가 선종한 해 태어난 마테오 리치의 선교는 이른바 문화 적응(cultural accomodation) 방식이었다. 서양의 진보적인 과학기술을 대상국에 접목하는 대신 선교의 편의를 얻는 방법이다. 마테오 리치의 후임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은 중국 연경의 남천주교당에 머물며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물론 사행길의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조선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예수회는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하비에르는 1550년부터 이듬해까지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수신사 일행을 목격했다. 1566년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가스파 빌레라 신부를 조선에 파견키로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벌인 통일전쟁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고니시 부대와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은 모두 유럽에 전해졌다. 예수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1954년이다. 교육에 역점을 두는 이 교단의 성격처럼 1960년에 서강대, 1962년에는 광주가톨릭대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3-03-1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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