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 안된 딸 던진 남아공 엄마 “생판 모르는 이들을 믿을 수 밖에”
임병선 기자
수정 2021-07-15 07:08
입력 2021-07-15 07:08
영국 BBC 홈페이지 캡처
지난 13일(이하 현지시간) 폭동과 약탈이 이어지는 남아공 더반의 한 건물에서 화재로 연기가 피어오르자 다음달에야 두 살 생일을 맞는 딸 멜로쿨레를 던져 목숨을 구한 날레디 마뇨니는 영국 BBC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당시 절박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래에서 딸을 안전하게 받아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LG전자와 삼성전자 공장이 폭도들에게 약탈을 당하는 동영상을 보며 안타까워 했던 우리 국민들로선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모녀의 동영상과 인터뷰다. 엄마가 감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약탈을 하려던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BBC 카메라맨 투투카 존디가 약탈꾼들로 북적이는 더반 시티센터 앞 거리에 서 있다가 이 긴박했던 순간을 담았다. 일층의 가게들을 약탈하던 이들이 불을 질렀고 건물 안에서는 이내 연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마뇨니는 동거남을 찾아와 16층에 머무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아 딸아이를 안은 채 계단으로 뛰어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 동의 아래로 내려왔지만 상가 쪽 입구가 차단돼 아래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해 그녀는 발코니를 통해 2층까지 내려올 수 있어서 그곳에서 아래 사람들에게 아기를 받아달라고 외치게 됐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사람들이 사다리를 갖다대줘 마뇨니를 비롯한 아파트 주민들이 내려와 목숨을 구하고 딸 멜로쿨레를 안은 뒤 20분쯤 흘렀을 때에야 소방차가 도착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와중에 남아공에서 몇년 만에 최악의 폭동과 약탈 사태가 빚어진 이유에 관심이 쏠린다. 델타 변이가 주도하는 제3차 감염 파동의 한가운데 있다. 최근 일주일 확진자 수는 1만명 이상이며, 이번 소요의 양대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수도권 하우텡주에서 전체 신규 감염의 50% 이상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주류판매 금지를 포함한 제4단계 봉쇄령이 지난달 말부터 2주간 내려진 데 이어 11일부터 2주 연장됐다. 남아공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봉쇄령의 하나인 록다운을 1년 4개월째 실시해왔다. 물론 중간중간 감염 파동이 잦아들면 규제도 완화하고 4단계 이전만 해도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허용됐으나 실업 보조기금(UIF) 지급은 지난 3월 이후 끊긴 상태다.
이 때문에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지난 11일 봉쇄령 강화에 영향받는 분야에 대한 UIF 지급을 재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8일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 수감을 계기로 그동안 억눌렸던 주민들의 반감이 터져나왔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폭동과 약탈 와중에 72명이 압사 등으로 사망하고 1200명 이상 체포됐다고 AFP 통신이 14일 전했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32%가 넘는 높은 실업률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빈곤층의 절망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남아공 최대 흑인 밀집지인 소웨토를 비롯해 최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알렉산드라 등 흑인 타운십 여러 곳에서 쇼핑몰과 상가를 겨냥한 약탈이 횡행했다.
남아공 정부 쪽에서는 주마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범죄분자들을 부추겨 전국적 소요를 일으킨다는 음모론적 시각도 있다. 국가안보 담당 장관은 전직 대통령과 연루된 첩보 대원들이 SNS 등을 통해 폭력 사태를 조장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가 12명의 소요 선동자 명단을 추렸고 그중 한 명은 주마 전 대통령의 개인 스파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콰줄루나탈의 더반 한인회 관계자도 1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주마 전 대통령 아들이 배후에서 폭력 사태를 조종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라고 말했다. 앞서 주마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그가 구금되면 나라를 통치불능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프리토리아의 마멜로디 흑인 타운십에서 사역하는 한 한국 선교사는 14일 “원래 도둑질이 기승을 부리는 남아공에서 범죄집단이 혼란을 조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가세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교민은 “평소에는 괜찮아 보이는 남아공의 민낯이 드러난 것 같다”고 개탄했다.
약탈 사태는 그동안 하우텡과 콰줄루나탈에서 주로 벌어졌지만 인근 지역으로 확산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이르면 이번 주말쯤 소요가 확산될지 진정될지 가늠할 수 있겠다는 전망이 나온다.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1
/
3
-
듣는 그날의 사건현장(65)
정연호 기자“안방 침대 밑에 머리가…” 3년을 아내 시신 위에서 잠든 남편이 저지른 또 다른 범행
-
주간 여의도 WHO(62)
박효준 기자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 조정훈, 신 보수 꿈꾼다
-
달콤한 사이언스(431)
유용하 과학전문기자‘영원한 화학물질’ 중년 남성의 노화 가속한다
-
사이언스 브런치(212)
유용하 과학전문기자쌀, 옥수수 생산 때문에 숲이 사라진다고?
-
민선8기 이 사업(17)
서유미 기자도로 열선·공공디자인의 힘… 달라진 용산, 편해진 일상
-
2026 투자 격차 리포트(4)
김예슬·이승연 기자“손실 복구” 한마디에… 550만원 뜯긴 개미, 9100만원 더 쐈다
-
권훈의 골프 확대경(11)
권훈 문화체육부 전문기자꿈의 59타!…LPGA서 딱 한 번, KLPGA도 나올까
-
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3)
오경진 문화체육부 기자·문학평론가가스실부터 소녀상까지… 기억의 파편, 예술로 묶다
-
글로벌 인사이트(289)
도쿄 명희진 특파원미중 긴장 완화 땐 입지 흔들… 다카이치 ‘경제안보’로 한국과 협력
-
월드 핫피플(122)
윤창수 전문기자군입대한 우크라 시인 “전쟁 범죄 4년차, 미친곰은 목표 못이뤄”
-
박성국의 러닝 보급소(5)
박성국 문화체육부 기자생애 첫 풀코스, 사나흘 전엔 훈련 확 줄여야 ‘건강 완주’
-
월요인터뷰(84)
박기석·강동용 기자“부동산 왜곡 주범은 ‘똘똘한 한 채’… 1주택 중심 세제 손봐야”
-
취중생(123)
손지연 기자대학가 ‘개강특수’도 옛말…고물가에 학생도 상인도 울상
-
박상준의 문장 여행(2)
온기로 씻어낸 자리, 차향으로 감싸고… 잡념을 비워낸 자리, 무소유로 채우네
-
로:맨스(83)
하종민 기자2차 특검 임명된 권창영…추가 혐의입증 가능할까
-
생생우동(51)
서유미 기자청년융자부터 월세지원까지…‘젊은 서울’을 위한 청년 지원
-
AI의 습격-법전 대신 알고리즘(7)
서진솔 기자“변시 준비도 벅차”… AI 진격에도 제대로 된 커리큘럼 없는 로스쿨
-
초격차 과학인재 1만人 프로...(21)
박기석·강동용 기자‘국가연구자’ 키우고, 軍 대체복무 늘린다
-
4차 산업 동맥, 서남권 에...(6)
세종 김우진·서울 김지예 기자한반도 ‘U자형 에너지고속도로’… “정부의 뚝심 있는 정책 의지 필요”
-
눈밭에 파묻힌 공정(3)
박성국 기자“바라는 건 딱 하나, 공정한 경쟁… 더는 억울한 선수 없어야”
-
하이브리드 현장을 가다(2)
창원 장진복 기자로봇 없인 공장 멈춰? 사람 없인 로봇 멈춰!
-
결혼, 다시 봄(10)
김가현 기자워킹맘은 눈치, 돌봄 대기 수개월… “돈보다 인프라 지원을”
-
박상준의 여행 서간(17)
글·사진 박상준 여행작가낭비 없이 빼곡히 채운 사랑과 존경… 절실함으로 써내려간 ‘김대중 옥중서신’
-
재계 인맥 대탐구(160)
김현이 기자주주환원에 진심인 방경만… KT&G 주가도 날았다
-
외안대전(52)
허백윤 기자“서해 보면 알 것” vs “이간질하지 말라”…미중 신경전으로 번진 韓핵추진 잠수함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