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에게 해외 여행은 ‘근대에 대한 동경’이었다

김기중 기자
수정 2018-04-27 18:43
입력 2018-04-27 18:32
“밤 되어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고 히로시마현에서 아침 해 바라보았지. 해군과 육군을 양성하느라 산자락 바닷가에 길을 내었고 산은 푸르게 숲이 우거졌으니 국방의 위력을 알 수 있었네.”
역사비평사 제공
역사비평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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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성 대부분이 여행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지만, 당시엔 교육받은 극소수 여성만 가능했다. 그 시대 여성들의 외국 여행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억압받는 여성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여성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박인덕이 1928년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여자와 직업문제’에도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시를 향해 올 때 역장마다 여역원(여성 역무원)들이 간단한 행장을 차리고 일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어디든지 사업이란 명칭이 있는 곳에는 남녀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일을 한다. (중략) 우리 가정 같아서야 일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정 사업에 헤매이기에 감히 다른 일은 염두에도 못 두게 되고…”라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수학여행에 관한 내용도 흥미롭다. 수학여행이 학교 정기 행사로 정착된 시기는 1920년쯤부터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 이후 실용주의를 부르짖으며 실업교육에만 치중하다 3·1운동 이후 교육정책을 달리한다. 중등교육과정에 인문교육을 시작했으며, 수학여행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 여행은 유흥으로 비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6년 10월 11일자에 “조선의 경제 상태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여행 시기가 농가의 추수기와 맞물려 인력적으로 낭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18-04-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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