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51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9)
수정 2006-01-16 00:00
입력 2006-01-16 00:00
제2장 居敬窮理(9)
마을 동구 밖에서 간신히 스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스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스님, 저희 집으로 가셔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선선히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두 사람은 오죽헌으로 돌아왔으나 스님은 한참 동안을 마당에서 놀고 있는 현룡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채근하자 스님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저 아이가 지나치게 똑똑하여 하늘의 천기를 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액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침 소문을 전해들은 현룡의 아버지 이원수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저 아이를 위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합니다.”
밤나무 천 그루라는 말에 기가 막힌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밤나무 천 그루를 한꺼번에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아이의 아버지가 혼자서 심어야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혼자서 밤나무를 심어야한다는 스님의 말에 이원수가 따지듯 물어 말하였다.
“아니, 무슨 이유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재능을 탐낸 하늘이 호랑이를 보내어 잡아갈 것입니다.”
“하필이면 밤나무여야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옛날 원효(元曉)대사께오서는 압량(押梁:지금의 경산군)의 남부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대사의 어머니께서 원효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내 그 율곡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내다가 홀로 해산을 하셨습니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해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아래서 해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습니다. 사라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셨던 상서로운 나무로 이 아이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는 원효대사의 가피(加被)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침내 할 말을 마친 스님이 합장을 하고 사라지자 외할머니는 사위에게 말하였다.“여보게, 어서 저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나. 저 스님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으네.”
장모의 말을 듣고 이원수는 하인을 불러 모아 밤나무 묘목 천 그루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밤나무 천 그루를 일시에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간신히 구한 것은 밤나무 오백그루.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밤톨로 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원수는 오백그루의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파주의 노추산으로 갔다. 스님의 말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아버지 혼자서 이 모든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원수는 혼자서 땅을 파고, 혼자서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2006-01-16 23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