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電 건설’맞서는 시민과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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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06-13 00:00
입력 2000-06-13 00:00
도쿄대에서 핵화학을 전공,잘 나가던 그가 35세 때인 73년 도쿄도립대 교수직을 내던진 것은 대학이나 기업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시민의 과학을 하기 위해서였다.
원자핵연구소 근무 당시 산과 바다를 찾아다니면서 핵실험의 산물인 ‘죽음의 재’ 성분이 어디에서나 검출되는 것을 보고 지구오염을 실감했다.이타이이타이병 등 공해사건에 대해 기업이 자료를 감추고,조사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대부분 풍토병 등을 내세워 기업을 옹호한데 대해 강한 분노를 느꼈다.
나리타(成田)공항 건설에 반대,불도저에 맞서 자신의 몸을 사슬로 나무에 묶고 저항한 산리즈카(三里塚) 농민들의 모습에 감명받았다.푸른 들을 파괴하고 공항을 세우는 것보다 농민들이 대지에서 농사짓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75년 9월 원자력자료정보실을 창설,시민과학자 활동을 시작했다.미하마 원전 1호 원자로 연료봉 절손사고를 은폐된지 3년여만인 76년 제보를 통해 밝혀냈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말 뿐이었다.미국 스리마일섬의 원전(79년)과 옛소련의 체르노빌 원전(86년) 대참사는 현대문명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게 했다.원자로의 안전신화를 깨뜨리는 사건들이었다.주민들이 원전 건설에반대하는 것은 보상금을 올려 받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고매한 분들의 말이신뢰성을 잃는 순간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재처리한 플루토늄 반입에 항의,93년 일본 과학기술청 앞에서 단식투쟁하며 ‘플루토늄에 미래는 없다’는 탈 플루토늄선언을 했다.
두차례나 암수술을 받고 죽음을 예감하며 쓴 이 책에서 그는 “체념은 현재의 위기를 방관할 뿐 아니라 가속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며 희망을 잃지말자고 말한다.다카키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도 열중이다.반핵운동가인 김원식씨 옮김.7,000원.
김주혁기자 jhkm@
2000-06-1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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