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 20년만의 귀국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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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6-15 00:00
입력 1999-06-15 00:00
그는 이날 서울 동숭동의 한 식당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항에서 들어오며 서울이 너무 많이 변해 얼떨떨했다.거리도 잘 정돈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파트숲과 한강을 보며 시멘트문화의 삭막한 도시로 변한 서울 풍경이 안타까웠다.아파트숲은 자연과 인간과의 융화를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졌다.한강은 파리의 센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큰 소중한 강으로 멋있게 꾸밀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서울의 이러한 모습은 철학의 빈곤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홍씨는 지난 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그동안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다.지난 95년 자전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내우리나라에 그 존재를 알렸다.최근에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를 냈다.
그는공항에서 아버지 홍승관(80)씨등 가족과 유홍준 교수등 지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서울에 온 그는 가장 먼저 대학로를 찾았다.
홍씨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많은 실업자나 거지들을 보며 사회보장의 미흡함을 느꼈다.프랑스에서는 1930년대 자전거 타고 바캉스를 가던 시절부터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자동차를 타고 휴가를 떠나는 오늘에도 사회보장이 제대로 안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분단이후 사회정의도 안보에 눌리고 경제제일주의에 밀려났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택시운전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내몸을 움직여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웠다.그 당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는데 택시운전은 나를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했다.그는 88년 4월부터 2년4개월간 택시운전을 했다.후배의 권유로 택시운전을 그만둔 그는 지난해까지 한국의상실 프랑스 지사장으로 일했다.지금은 글쓰는 것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는 “한국의 산과 들 등 자연을 가장 보고 싶었다.보고 싶은 사람도 굉장히 많았으며한 사람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원망하고 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는 그의 말에는 자신이 강조해온 관용의 자세가 엿보였다.
“영구귀국할 것이다.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겠는가.파리의 생활은 ‘나 있는 곳에 우리가 없는 쓸쓸한 이방인의 삶’이다.”그의 부인도 파리생활은 적막한 절간 생활과 같다고 말했다.홍씨는 그러나 “당장 돌아오기는 어려운 상황이다.파리에서 글도 쓰고 한반도를 바라보며 공부도 더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 정권과 과거 정권과의 근원적인 차이는 극우집단이정권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고 말했다.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평가에는 부정적이다.“박정희를 재평가하려는 것은 철학의 빈곤때문이다.땀흘려 일한 사람이 누군데 경제발전을 박정희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론은 이미 그 전정권에서 계획이 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을 강하게 비판했다.“한국의 정치 지도층이나공부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책무 의식이 너무 부족하다.”중도좌파의 감성적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그는 가장 힘겨운 때는 80년대 초 전두환정권이 등장했을 때였다고 말했다.“한국사회에 희망이 없어 보였다.” 홍씨는 “한국에 돌아오면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싶다.그리고 사회진보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민하는 젊은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사회적 책무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는 출판기념회,강연 등바쁜 일정을 마치고 7월7일 프랑스로 돌아갈 예정이다.
이창순기자 cslee@
1999-06-1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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