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성재휴(이세기의 인물탐구: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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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6-02-24 00:00
입력 1996-02-24 00:00
아침햇살을 받고 먼 항해를 떠나는 풍곡의 「출범」은 언제봐도 찬란하고 의기양양하고 힘차다.청옥타래를 장식한듯 크고 작은 도서를 거느린 그의 돛단배들은 어느 때는 탁하고 어느 때는 눈시린 하늘을 배경한채 이상향을 향한 도도한 항진을 멈추지 않는다.유장하게 흐르는 끝없는 항로는 전에는 그의 미래였으며 이제는 그가 지나쳐온 먼먼 뒤안길이다.
평론가 이구열씨는 『풍곡의 독특한 준법은 웅장하면서도 교만함이 없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간사함이 없고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 천박하지 않으며 힘이 넘치는 붓질과 시원스럽게 펼쳐진 화면구성이 특징』이라고 말한다.먹붓을 매끄럽게 다듬기보다 갈라지고 뭉친대로 파필과 파묵을 구사하여 강인하게 풍상을 견딘 천봉만학과 비바람에 마르고 닳은 산간석경을 「붓이 가는대로」 창출해 낸다.여기에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성을 강조한 점과 적·황·남청색을 대비시킨 색채의 변환은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듯한 방타,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선획과 더불어 진취적이고 야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겨나게 한다.
○야인적 분위기 물씬
이런 풍곡의 세계를 향해 원로 이경성씨는 『전에 듣지 못하고 후에도 본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임을 전제,『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방일은 자신만의 용필과 묵법을 일시에 실현시키고 있다』고 평한다.따라서 『그는 동양화로 불렸던 전통적인 화법을 깨고 그만의 화풍을 이룩하면서 「자연그대로」를 화면에 전개시키는가하면 어느 작품은 거의 추상에 가깝고 어느 작품은 서양화를 방불케 하여 기술적 정신적 측면에서 한국화를 개척하는데 앞장선 동양화 대가』임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른바 『잔잔한 기교에 연연하기보다 한국미의 본질인 대범한 문기에서 우러나온 예리한 필단(붓끝)으로 시기속취를 없앤 묵색의 창윤과 구도의 웅대함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곡이라고 하면 그를 아는 사람들은그의 활달한 화폭을 곧잘 그의 특기인 남도창에 비유하곤 한다.한량없는 주흥에 겨워 도끼로 찍어내듯 터져나오는 그의 창처럼 중중몰이 휘몰이로 이어지는 그의 화필은 남성적 스케일과 템포와 스피드와 박력을 드넓은 화면에 유창탁발하게 발휘해 낸다.예의「부드러운 우미의 서정성을 배격한 패기와 생명감에 넘친 장미의 의지적 공간」이 그것이다.
그의 술친구이자 한학자인 조규철씨의 「풍곡화실기」에 보면 「한창 술에 취해 노래와 웃음이 집을 흔들흔들하게 하고 방약무인한채 호기가 진탕하여 스스로 제지할줄 모르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는 미친듯이 그림에 몰두하여 그 정사와 세심이 삼매지경에 든다」고 쓰고 있다.실제로 그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탈하고 강렬한 인간적 체취와 즉흥적으로 발설하는 예술의 핵심적 본질론이 그의 작품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뉴욕초대전 호평 받아
풍곡은 경남 창녕에서 십리 못미처 위치한 창락면 어섬(어도)에서 태어났다.글방과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창녕읍 골동서화점에서 일한 것이 자신의 그림 소질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고 18세 되던 해 대구의 서화가인 석재 서병오에게 사군자와 묵화를 사사,1년도 못되어 스승이 타계하자 이번엔 화법교본인 「개자원화보」로 독학하다가 다음해 호남의 산수화 대가인 의재 허백련문하에서 정통 남종화법과 고전적인 그림 지식을 섭렵해 나갔다.
그러나 그림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그의 고집스럽고 타협을 모르는 외곬의 성격은 지나치게 화보식인 법규를 초탈하여 자신만의 기질적인 필정과 묵취와 생명감으로 독자적 세계를 개척하기에 이른다.사풍의 고법형식을 좇지 않고 스승의 노여움을 받아가면서까지 그만의 화풍을 갖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반란으로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그는 오랫동안 국내화단에 외면당하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홀로 진주에 머물러 현대적인 방법을 모색한 일련의 작품으로 55년 서울에서 첫 전시,동아일보는 『전통을 고수하는듯 하면서도 새로운 선을 느끼게 하는 건실한 선,푸근한 묵운,탈속한 설채』란 호평을 실었으나 국내 화단은 끝내 냉담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57년 뉴욕의 저명한 화랑주인 부세티여사가 한국에 왔다가 때마침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열린 그의 두번째 개인전을 보고 뉴욕 월드화랑이 주최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형식적 유형에서 이탈된 분방한 먹붓그림」이 서양인들에게 크게 어필하면서 60년대 미국 화단에서 그림이 거래되는 유일한 동양화가로 올라서게 되었다.이렇게 풍곡의 경우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아 국내에 알려진 케이스로 우리 화단은 그의 예술의 진가를 알아보기에 인색했거나 알아보지 못한 결과를 빚은 셈이다.
정치적인 사교나 계산있는 대인관계에 어두운 그로서는 그후에도 해외 활동 20년만인 78년 중앙미술대전에 초대되었고 평생 처음 사회적 영예인 중앙문화대상을 수상,국내화단은 비로소 노익장의 예경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80년대의 「돛단배」시리즈가 풍부하고 화려한 화면속에서 역동적 낭만성을 드러내고 있다면 90년대의 현실적인 산수풍경이나 호랑이나 새나 물고기를 의인화한 해학적 표현과 묵법 담채의 담대한 표현성으로화면의 신선감과 묘체를 성취,국내화단은 「전통화단의 거인 예술가」로 풍곡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그의 화풍을 모방하거나 그런 류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외부인 접촉 일체 삼가
그의 일상생활은 지극히 서민적이고 물욕이 없는 야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정성을 담았다해도 마음에 들지않는 그림은 미련없이 찢어버리는 단호한 제작정신을 지키고 있다.전에는 친구들을 만나 말술에 바둑을 두거나 등산을 즐기기도 했으나 3년전부터 거동이 불편하여 말술도 친구도 끊고 요즘은 연희동 자택에 칩거한채 소품에나 손대고 있다.가족은 부인 강신애씨(71)와의 사이에 3남2녀,차남인 종학씨가 동양화가로 활약하고 있다.
『선도 악도 불자체는 아니며 그리로 이르는 과정(불가선불가악)』일뿐 이라는 그의 소신대로 그는 언젠가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마는 하도 어려워서 붓가는대로 이리저리 칠할따름』이라고 겸허한 자세를 고백한 바 있다.자신의 노추를 남에게 보이지 않고자 사진은 물론 사람 만나기를 일체 꺼리고가족이든 누구든 그의 그림에는 일체 손을 못대게 하는 등 한번 안되는 것은 끝까지 「안된다」「안한다」는 고집은 여전하다.
이제 장렬한 석양 앞에 선 그의 귀범은 모든 구차한 격식을 떨쳐버린채 투묘를 서두로는 시기다.그러나 그의 정박은 잠시의 휴식일뿐 그는 또한번 먼 항해에 앞선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내일 힘차게 닻을 올리게 될 것이다.
□연보
▲1915년 경남 창녕출생
▲1934년 의재 허백련문하에서 수업 19 38년 이충무공영정제작(충무 착량묘에 봉안),진주에서 작품생활
▲1950년 대한미술협회회원
▲1955년 첫개인전(서울 동방살롱)19 57년부터 백양회회원, 개인전(서울 동화백화점),뉴욕 월드화랑주최 「한국현대작가전」초대
▲1958년 샌프란시스코박물관주최 「아시아미술전」 한국대표 초대
▲1959년 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0년 중국 대북·향항미술관초대 「특별전」,뉴욕빌리지미술관 공모전 김상수상, 뉴욕시립도서관초대 개인전
▲1962년 워싱턴 웨스트엔드화랑초대 개인전
▲1965년 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8∼74년 수도여사대교수
▲1969년 개인전(서울 신문회관)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주관 「동양화대전」초대,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백양회이사, 개인전(서울미술회관)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초대,개인전(동산방화랑),동아미술제 심사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주최 「현대미술초대전」
▲1984년 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87년 서울시주최 「서울미술대전」초대,현대백화점개관기념 초대전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준공 개관기념전초대,「서울미술대전」초대
▲1987년 「풍곡성재휴 회고전」(호암갤러리)
▲<수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상(78년)
1996-02-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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