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비운 리더십, ‘화(和)’로 읽다”

서미애 기자
수정 2026-03-30 01:03
입력 2026-03-30 00:59
[특별강연] ▒김황식 전 국무총리, 하나은행 컬처뱅크광주 ‘명사와의 대화’
- 일본 88인의 삶에서 길어 올린 ‘공존의 미학’
“욕심 없는 마음으로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제시한 이상적 지도자상은 소박했지만 묵직했다. 정치적 수사 대신 인성과 절제를 앞세운 그의 메시지는, 오히려 오늘의 한국 사회에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난 3월 17일, 하나은행 광주금융센터지점에서 열린 ‘컬처뱅크 광주 – 명사와의 대화’. 강단에 선 김 전 총리는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 사회의 좌표를 되묻는 방식으로 강연을 풀어냈다.
‘이슬비같은 진심, 하나로!’ 라는 주제로 그의 저서 『일본인 88인의 이야기』. 그러나 내용은 단순한 일본 인물사 해설을 넘어,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성찰’에 가까웠다.
이날현장에는 김필식 동신대학교 이사장을 비롯해 동신대 최고위과정 원우,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 시민, 하나은행 임직원 등 50여 명이 참석해 깊은 공감을 표했다.
“화폐 속 인물은 국가의 가치 선언이다”
김 전 총리는 일본 지폐 속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뿐 아니라 소설가, 교육자, 과학자가 고르게 등장하는 일본의 화폐는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존중하는 가치의 집약체’라는 것이다.
김 전 총리는 “한 사회가 어떤 인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가는 곧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보여준다”며 “우리 역시 화폐 속 인물을 통해 어떤 가치를 공유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일본 만엔권 인물로 선정된 시부자와 에이이치, 여성 교육의 선구자 쓰다 우메코, 그리고 작가 히구치 이치요와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까지—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공존하는 일본의 사례는 ‘다양성의 제도화’라는 점에서 시사점을 던진다.
쇼토쿠 태자의 ‘화(和)’…일본 정신의 기원
김 전 총리는 또 일본 정신의 뿌리를 7세기 쇼토쿠 태자에게서 찾았다.
불교와 신도를 배척하지 않고 융합한 ‘습합(習合)’ 사상, 그리고 서로 다른 가치를 조화시키는 ‘화(和)’의 정신이 일본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는 분석이다.
김 전 총리는 “일본인들이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사찰에서 치르는 이유 역시 이 포용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은 청중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일본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갈등을 흡수하고 공존으로 전환하는 능력—그 ‘사회적 기술’에 대한 냉정한 관찰이었다.
오타니의 만다라트…‘인성’까지 설계하다
강연에 등장한 인물은 메이저리그 스타 오타니 쇼헤이였다. 그러나 김 전 총리가 주목한 것은 그의 성적이 아니라 ‘태도’였다.
고교 시절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에 ‘운(運)’을 포함시킨 점, 그리고 쓰레기를 줍는 이유를 “남이 버린 행운을 줍는 것”이라 설명한 일화는 단순한 미담을 넘어선 ‘자기 수양의 방식’으로 소개됐다.
김 전 총리는 “승리 후에도 상대를 배려하는 절제된 태도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시대적 인성”이라고 강조했다.
경계인의 비극, 그리고 화해의 가능성
강연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 대목은 한국계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이야기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의 후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과정에서 평화를 모색했던 그의 삶은 ‘경계인의 숙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 전 총리는 도고의 후손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주제국에 51, 조국에 49의 마음을 두라”는 그의 말을 외교적 지혜로 해석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삶을 넘어, 한일 관계의 미래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읽힌다.
“조용히 웃는 사람”…정치에 던진 질문
김 전 총리는 일본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인용했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 한 문장은 현재 한국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대신,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김 전 총리는 자신의 저서 집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일 관계는 애증과 대립, 무관심이 반복돼 왔다. 그러나 인물의 삶을 통해 일본을 깊이 이해할 때 비로소 미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
그가 다룬 88인의 궤적은 단순한 역사 나열이 아니다.
정치지도자, 사상가, 예술가, 개혁가를 종횡으로 엮어 일본 사회의 ‘의식 구조’를 해부한 시도다.
결국 그의 메시지는 하나로 귀결된다. 국가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품격’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 김황식 전 총리 약력
- 서울대 법대 졸업
- 대법관
- 감사원장
- 국무총리
- (현) 삼성그룹 호암재단 이사장
- (현)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광주 서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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