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같은 닷새간 ‘농약사이다’ 참여재판 막 내려
수정 2015-12-12 00:10
입력 2015-12-12 00:10
무선 마이크 착용한 檢·辯 배심원단 설득 위해 불꽃 튀는 신경전
지난 7월 40여 가구가 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회관에서 할머니 6명이 농약(메소밀)이 든 사이다를 마셔 2명이 숨지고 4명이 중태에 빠진 지 5개월 만에 이뤄진 재판이다.
특히 범행 사실을 완벽히 입증할만한 직접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 할머니 유·무죄 여부가 처음 결정나는 까닭에 검찰과 피고인 변호인단은 법정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치열한 공방을 매일같이 펼쳤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배심원단을 설득하기 위해 각자 준비한 치밀한 논리와 범행 현장에서 확보한 범행 도구·흔적 등 증거를 유기적으로 묶어 공소사실에 대한 유·무죄 입증에 나섰다. 상대방 허점을 파고들며 논리를 깨뜨리려 반박과 재반박을 이어가며 연일 날카롭게 대립했다.
양측의 팽팽한 대결이 이어지자 오전 10시에 시작한 재판이 자정을 넘겨 마무리된 날도 있었다.
참여재판이 열린 대구지법 11호 법정 방청석 80개를 꽉채운 방청객들은 7m가량 거리를 두고 마주앉아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는 검찰과 변호인단의 모습을 재판기간 내내 숨죽이며 지켜봤다.
대구지법 제11형사부(손봉기 부장판사) 심리로 지난 7일부터 시작한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첫날 오전 9명의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부터 날선 신경전을 벌였다.
첫날 오후 1시 40분께 법정에 들어선 이들은 좌·우측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해온 수사자료 뭉치 7∼8개와 사이다 빈병 등 증거물을 담은 박스 등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앞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580여 건의 증거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 시작 전 양측은 거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작전을 짜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재판이 시작되자 녹색 수의를 입은 피고인 박 할머니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지팡이를 짚고 법정으로 들어왔다. 방청석에 앉아 이를 보던 박 할머니 가족 등은 울음을 터뜨렸다.
변호인석 바로 옆에 앉은 박 할머니는 주소, 나이 등을 묻는 재판부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후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 가쁜 숨을 내쉬기도 했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기도 했다.
먼저 검찰이 4천페이지 분량의 수사기록에서 유죄 입증을 확신할만한 사진과 증언 등 핵심 증거를 압축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배심원단에 선보이며 변호인단을 압박했다.
자료 사진에는 농약에 중독된 피해 할머니들이 거품을 내뿜은 상태에서 마을회관 안에 쓰러져 있던 모습과 경찰 압수수색 상황 등이 담겼다.
무선 마이크를 착용한 검사 3명이 차례로 법정 중앙에 나서 배심원단을 향해 박 할머니 범행 동기와 검·경 수사를 통해 밝혀낸 각종 범행 증거 및 사건 당일 행각, 사건 발생 이후 보인 미심쩍은 행동 등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눈을 감은 채 이런 내용을 듣던 박 할머니가 변호인단을 통해 무릎이 아프다며 의자보다 법정 바닥에 앉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고 요청하자 재판부는 검찰 측 동의를 얻어 허락했다.
검찰 측 설명이 끝나자 변호인단 역시 무선 마이크를 차고 중앙에 나왔다. 배심원단이 검·경 수사기록 등을 볼 수 있도록 프로젝터 스크린에 올린 뒤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등 검찰이 내놓은 주장들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다음날에도 각종 증거 자료에 대한 검찰-변호인단의 기싸움은 계속됐다. 이 과정을 통해 배심원단이 유·무죄를 판가름할 수 있는 사건 핵심쟁점은 사건 당일 마을회관 내·외부 상황, 박 할머니 범행동기, 범행도구로 알려진 자양강장제 병 상태 등 내용들로 추려졌다.
이런 까닭에 이날 오후부터 넷째날까지 진행된 증인 및 피고인 신문에서 검찰·변호인단은 이 같은 부분에 대한 의문점을 집중적으로 캐묻는 방식으로 각자 주장을 부각시켰다.
양측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이 나올 경우 순서가 아님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실이 아닌 의견을 질문한다”, “배심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질문이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이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자 참다 못한 재판부가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재판 기간 검찰과 변호인단은 피해 할머니 2명, 최초 신고자, 수사 경찰관, 행동분석 전문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 피고인 가족 등 모두 16명을 증인으로 출석시켰다.
특히 이 기간 농약이 든 사이다를 마신 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피해 할머니 2명과 피고인 박 할머니의 법정 만남에도 많은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직접적인 대면은 이뤄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 할머니들의 심리상태 등을 고려해 증인석 주변에 가림막을 설치토록 했다. 피고인 박 할머니는 7∼8m 가량 떨어진 법정 바닥에 앉아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만 들었다. 자신이 수사 당국에 진술한 것과 상반된 내용의 증언 등이 가림막 너머로 흘러나왔다.
재판부는 “서로 알고 지냈던 피고인과 그 가족 등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증인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가림막을 설치토록 했다”고 말했다.
넷째날 오후에는 피고인 박 할머니가 신문을 받기 위해 증인석에 앉았다.
유·무죄 평결을 앞둔 배심원단이 박 할머니 입을 통해 사건 당시 상황을 직접 들은 뒤 지금껏 검찰과 변호인단이 제시한 각종 사건 증거 등을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박 할머니의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탓에 검찰과 변호인은 자신들 차례가 되면 증인석에 앉아 있는 박 할머니 왼편에 바짝 다가가 준비한 질문을 이어갔다.
3시간여 동안 이어진 신문에서 박 할머니는 “내가 왜 친구들을 죽이려고 사이다에 농약 넣었겠나. 지금 얼마나 억울한지 모른다”, “증인으로 나선 피해할머니 A씨가 거짓말을 했다”며 수차례 무죄를 호소했다.
또 검찰이 박 할머니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증언 내용과 상반되는 증거자료 등을 제시할 때에는 “모른다”, “기억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기존 진술을 번복했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박 할머니 가족은 신문 과정 중간 중간 긴 한숨을 내쉬거나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쳤다.
검찰과 변호인단의 피고인 신문이 모두 끝나자 이날 방청석에서 온종일 재판을 지켜봤던 피해 할머니 자녀 2명이 증인석에 나와 눈물을 글썽이며 “불미스런 사고로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원통하고 안타깝다. 사건 진실을 반드시 밝혀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닷새 간의 참여재판 일정이 끝나는 11일 오전. 11호 법정 방청석 안 80개 의자와 좌·우·뒷면 공간은 방청객들로 꽉 채워졌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배심원단 앞에서 사건 개요 및 증거 자료 등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유·무죄 입증을 위한 최후 진술을 펼쳤다.
재판부는 다음 순서인 배심원단 평의·평결 절차가 충분한 시간 속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양측에 최후 진술 시간을 각각 3시간씩만 배정했다.
이에 따라 검찰과 변호인단이 번갈아 법정에 나서 의견을 펼칠때 마다 재판부는 스톱워치로 시간을 쟀다.
최후 진술에서 양측은 비록 상반된 증거와 주장 등을 내놨지만 “상식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부탁한다”는 요구만은 똑같았다.
이날 검찰은 박 할머니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하지만 박 할머니는 배심원단 평결 직전 있은 최후 진술에서 “경찰이 눈으로 보지도 않고 날 잡아 넣은 것이 가장 억울하다. 나 때문에 아이들 고생하는 것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억울해서 살이 벌벌 떨린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내가 왜 친구들 죽이려고 사이다에 농약을 넣겠냐”며 마지막까지 결백을 호소했다.
방청석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가족들이 고개를 숙여 흐느꼈다.
이날 배심원단은 5시간여에 걸친 평의 끝에 만장일치로 박 할머니의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도 “피고인의 죄가 무겁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구지법 제11형사부 손봉기 부장판사는 “이번 참여재판 기간 검찰·변호사 등이 각자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증거들이 나왔고 배심원 판단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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