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자랑하더니”…日가전은 왜 급격히 몰락했나[김태균의 J로그]
김태균 기자
수정 2023-03-29 06:22
입력 2023-03-28 11:21
“소비자 수요보다 기업 사정을 우선시한 결과”
장인정신에 매몰돼 ‘3고 신앙’에 빠진 日기업들
일본 경제 주간지 프레지던트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져봄 직한 이 질문에 대해 전자 대기업 임원 출신 전문경영인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일본의 가전산업은 왜 몰락했는가’를 발췌, 지난 23일 인터넷판에 게재했다.
책의 저자는 일본 TDK의 미국법인 부사장을 역임한 가쓰라 미키(62). TDK는 교세라, 무라타제작소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부품 회사다.
가쓰라는 책에서 “일본 가전산업의 몰락은 소비자의 바람보다 기업의 사정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국 애플이 아이팟으로 전 세계 뮤직 플레이어 시장 판도를 바꿔놓았을 때 일본 기업이 전혀 대응하지 못했던 데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다”고 했다.
“일본 공업제품의 대표적인 수식어는 ‘고품질’, ‘고성능’이다. ‘기술 대국’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일본 사회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린 고집이다. ‘메이드 인 재팬’은 바로 그 집념의 대명사였다. 제품에 ‘메이드 인 재팬’이 새겨져 있으면 고품질, 고성능이라고 전 세계가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제조’가 아닌 ‘장인정신’을 고집한 결과가쓰라는 그러나 기술에 대한 고집과 자부심은 결과적으로 일본 가전산업이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됐다고 지적하고 그 핵심으로 ‘모노즈쿠리’(物作り)를 지목했다.
모노즈쿠리는 1990년대 말 이후 널리 퍼진 표현으로 장인 정신을 중시하는 일본의 독특한 제조 문화를 함축한 말이다. 물건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는 장인정신의 상징어다.
“일본의 ‘제조’는 어느새 ‘모노즈쿠리’로 승화됐다. 옛 장인의 기술을 계승하는 ‘모노즈쿠리’는 일본 제조업의 강점이자 번영의 원천으로 인식됐다.”
이런 가운데 진행된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일본 기업들에 중대한 도전을 안겼다.
“(자급자족주의를 버리고) 수평적 분업을 지향하는 미국 방식을 따라가자니 현장 직원들의 대량 해고가 불가피해지는 문제가 생겼다. 또 (고성능 주의를 버리고) 범용 제품을 대량 생산하자니 한국, 대만 등 신흥 세력에 가격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3고 신앙’에 빠진 일본 기업의 말로“많은 기업이 고부가가치, 고품질, 고성능의 제품이라면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소비자들에게 먹혀들 것이라고 믿었다. 이른바 ‘3고 신앙’이다. ‘싸고 좋은 것을 만들면 반드시 팔린다’는 아날로그 시대의 명제가 ‘좋은 것을 만들면 반드시 팔린다’로 전환됐던 것이다.”
실제로 ‘3고 신앙’은 일본 기업의 제품 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많은 가전업체가 시도한 ‘3고’의 성공 사례는 많지 않았다.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부가가치 창출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와 카세트 라디오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자랑하던 일본 기업들은 디지털화와 함께 길을 잃기 시작했고, 이 분야는 결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는 제품군이 되고 말았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보다는 기업의 사정을 우선시”“당시 일본 가전업체들도 애플과 마찬가지로 높은 부가가치를 추구했다. 하지만 사용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를 찾지 못했고, 그저 다기능화에만 주력했다. 이를테면 미니 컴포넌트 오디오에 CD와 MD뿐 아니라 USB 단자와 SD카드 슬롯을 탑재한 모델을 등장시켰다. 하드디스크를 탑재해 작은 화면에 사진 영상으로 띄워주는 제품까지 개발했다.”
일본 가전업계는 이 밖에도 충격에 강한 컴퓨터, 입체영상을 볼 수 있는 3차원(3D) TV, 흠집이 나지 않는 광디스크 등 다양한 제품에 다양한 부가가치를 부여했다.
가쓰라는 “일본 가전업체들은 디지털화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면서도 가격은 높게 책정했다”며 “사용자들이 추가된 기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그만큼 가격을 낮췄어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쓰라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과 같이 일본 기업이 추진한 ‘고부가가치화’는 실제로는 ‘다기능화’에 불과했고 이걸로는 판세를 뒤집을 만한 영향력이 창출되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그의 주장이 일본 가전산업 쇠락의 전체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기술 대국’과 ‘모노즈쿠리’의 자부심이 가져온 부(負)의 산물이라는 관점은 흥미롭다.
김태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