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의료법안] (하) 나도 소송겪은 의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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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영 기자
수정 2006-11-16 00:00
입력 2006-11-16 00:00
얼마 전 부산의 성형외과 의사가 수술 중 일어난 사고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봉기(가명·51) 원장은 5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김 원장은 2002년 1월 의료사고를 경험했다. 그의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가 뇌성마비에 걸리자 산모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제왕절개 수술을 제때 하지 않았다며 의료진의 책임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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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에서 패소한 김 원장은 그걸로 끝내려고 했다.“법원에서 소장(訴狀)만 날아와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보험금으로 다 보상해 주고 그대로 덮어버리고 싶었지요.”

하지만 변호사는 끝까지 가보자고 했고 결국 3심까지 간 끝에 김 원장은 승소를 했다. 그러기까지 3년은 악몽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그나마 소송 과정에서 환자 가족들이 병원에 찾아와 소란을 부리거나 협박을 하지 않은 게 다른 의사들에 비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요즘 또다시 소송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이번에는 5년 전과는 정반대로 피해자의 입장이다. 지난해 친동생이 어이없는 의료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김 원장의 동생은 뇌수막염으로 지방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가 후유증을 얻어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공간지각 능력을 잃어 누군가 부축을 해줘야만 움직일 수 있다. 혼자서 바깥에 나갈 수도 없다.

“뇌수막염은 병원에서 1주일 정도만 치료 받으면 금세 나을 정도로 가벼운 질환입니다. 열과 콧물이 나는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어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입원한 지 1주일이 지나자 동생은 퇴원은커녕 식구들도 못 알아볼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 배는 가스로 가득 차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의사들은 그때까지도 “완전 정상이다. 전혀 문제 없다.”며 오히려 가족들을 타박했다. 담당 과장은 동생이 중환자실로 옮겨졌는데도 아침 회진마저 거르고 박사논문을 쓴다며 서울로 훌쩍 떠났다.

“의사가 환자 안 보고 뭘 합니까. 그렇게 해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뭐 합니까. 수련의는 바빠서 환자를 못본다는 게 핑계가 될 순 없지요. 내 가족이라고 생각해도 그럴까요.”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 진료기록 복사본을 구하면서도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환자가 진료기록을 요구하면 차트를 완전히 새로 쓰고 의사·간호사들이 입을 맞추기도 한다기에 의심은 갔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새로 옮긴 병원의 의사들은 “형이 의사가 아니었더라면 동생은 죽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냥 두었더라면 막무가내로 수술을 하겠다며 배를 갈랐을지도 모를 만큼 진료의 기초조차 지키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담당 의사의 불성실한 태도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그 의사는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나도록 김 원장 가족에게 전화 한 통,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동생의 상태가 걱정돼 전화를 했더니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십니까.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의사는 신이 아닙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운전을 해도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는 피할 수 없듯이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환자를 제대로 보살핀다면 100% 막을 수 있는 사고도 있습니다.”

김 원장은 “이런 사람에게 의술을 맡겨선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병원에 찾아가 문제를 공론화시킬까 생각도 했지만 한 사람의 미래를 망치는가 싶어 매번 그만두곤 했다. 소송도 그랬다. 끔찍한 일을 겪어본 당사자로서 웬만하면 법정으로 일을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의 몸을 망쳐 놓고도 책임을 지기는커녕 뻔뻔하게 나오는 의사와 병원의 태도를 보면서 생각이 변했다. 의료계에 경종을 울리고 싶은 마음이다. 김 원장은 소송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美, 소송전 분쟁조정·의사 책임보험 의무화

미국은 1960년대 의료사고 소송이 급증하자 일찌감치 ‘의료과오개혁법’을 제정했다. 소송 전에 분쟁조정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의사에게는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했다. 주(州)마다 분쟁조정 과정에 강제심사제도나 조정제도를 두어 쓸데 없는 소송으로 인한 경제적·시간적 부담을 덜게 했다. 책임보험의 형태와 운영 주체도 다양하게 해 의사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다.

일본은 대부분 민사소송을 통한 손해배상에 의존하고 있다. 의료사고 소송은 화해율이 일반 민사소송보다 높은 편이다. 의사배상 책임보험은 사(私)보험과 일본의사회 보험으로 이원화돼 있다.

사보험의 경우 과실로 인한 의료행위로 어떤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상해를 입힌 경우에 한하기 때문에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행위나 고의로 인한 사고, 무면허 의료행위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일본의사회 보험은 보상한도가 1건당 1억엔, 연간 총보상한도가 3억엔으로 현실적인 편이다.

다만 의사회 자체가 의무가입은 아니어서 전체 의사의 43%만이 가입해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각 단체서 보는 대안은

의료사고는 급증하고 있지만 피해자들을 위한 사회적 대안이나 장치는 미흡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각계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의료소비자=“의사가 무과실 입증하게 해야”

의료사고 피해자 지원단체인 의료소비자시민연대(의시연)는 의료사고피해구제법을 서둘러 제정, 과실이 없다는 걸 의사들 스스로 입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시연 강태언 사무총장은 “피해자들은 전문지식이 모자라는 데다 의료정보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하기 어렵다. 교통사고처럼 가해자인 의사가 자신의 과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의시연은 병원 내부 수술실과 중환자실, 분만실 등에 폐쇄회로(CC)TV 설치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강 사무총장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의료현장의 모습을 기록하고 열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제대로 된 실태 파악을 위해 하루 빨리 병원이 의료사고 보고 의무 시스템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의사=“기피부서 전공의 보조수당 확충”

대한의사협회는 적정한 의료수가 보장과 전공의 기피부서에 대한 보조수당 확충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협 김태학 의사국장은 “비현실적 의료수가 탓에 박리다매식 진료행위가 빈번한 데다 응급환자나 중환자 등을 치료하는 특정 진료과목에 필요한 의사인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의료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좀 더 현실적인 기피과목 전공의 보조수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사기관=“독립적 감정기관 필요”

수사기관들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감정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 오민석 주임은 “관내 대형 병원에 수사협조를 구해도 비협조적이어서 주로 의협에 의뢰하지만 회신 내용이 명확하지 않고 기간도 길어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 중립성과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는 독립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김종로 부장검사는 “주로 의협의 자문을 받고 있는데 100% 공신력이 보장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정하게 판단해 줄 수 있는 기관이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기관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피해자 구제를 우선으로 보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의료전문재판부 신수길 부장판사는 “과실 여부도 중요하지만 일단 보험이나 의료공제 가입을 강제해 적절한 피해자 보상제도부터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 시스템은 환자와 의사 모두 피해자”

전문가들은 의료사고는 환자와 의료진 모두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윤 교수는 “표준화되지 않은 업무 절차와 수많은 인수인계 절차, 긴 근무시간 등이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주된 원인이기 때문에 전자의무기록을 만들어 병원간 교류를 통해 절차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고가 발생하면 의료진은 환자측에 사고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고 정서적인 사과와 물질적인 보상을 병행하는 설득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의료 과오를 저지른 의사가 같은 의료진의 정서적인 지지를 통해 실수를 공개하고 예방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대과실이 아닐 경우 면책특권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2006-11-1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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