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위에 세운 그들의 천국… 과연 지옥과 다를 게 있을까[오경진의 폐허에서 무한으로]

오경진 기자
수정 2026-11-04 00:14
입력 2026-11-04 00:14
<18>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 사이
구원받을 미래에 희망을 건 연옥마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같아
자유의지 지워버린 ‘역설적 천국’
설계된 낙원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위키피디아 제공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3곡 중에서)
지옥은 영원 속에 놓여 있다. 지옥문 앞에 서서, 거기에 새겨진 글귀를 읽어본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살벌한 명령일까. 아니다. 한 치의 희망도 들어설 수 없는 그곳에서, 헛된 꿈일랑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서늘한 충고다. 인간이 살아서 죄를 저지르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한다. 그 영혼의 처지를 헤아려본다. 영원하고도 빼곡한 절망 속에 유폐된 영혼은, 살아서 죄를 저질렀던 그 인간과 같은가 다른가. 둘 사이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탈리아 시성(詩聖)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을 다시 읽으며, 희망과 절망이 어떤 관계인지 꼽씹는다. 인간은 희망으로 살아간다. 희망과 절망은 서로의 부재(不在)를 가리킨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절망이 들어서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는 희망과 절망이 짝패라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희망 속에서 절망을 두려워하고, 절망 속에서 비로소 희망을 품으니까.
그러나 세계에 절망만 있다면, 절망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상태에 불과하다. 희망을 완전히 잃은 영혼에게 절망은 더이상 고통을 주지 못한다. 불길 속에 놓인 돌을 생각해 보라. 타오르는 불길은 돌을 뜨겁게 달구지만, 돌 자체에 고통을 안기지는 않는다. 절망 일변도로 굳어버린 마음이란 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절망은 희망과 짝을 이룰 때 비로소 절망이 된다. 지옥의 영원한 절망은 오히려 절망을 무화(無化)해 버릴 뿐이다.
“연옥은 시(詩)에 있어 천국과 지옥을 능가한다. 천국이나 지옥에는 없는 미래를 나타낸다는 점에서.”(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기독교의 정수’ 중에서)
시간은 변화를 촉발한다. 영원성이 지배하는 지옥이나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 따라서 변화도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박제된 듯 한결같다. 연옥은 다르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전 영혼들이 ‘정화’의 시간을 견디는 연옥에는 분명 시작과 끝이 있다. 고통의 시간을 견디면 구원의 미래가 온다. 미래가 반드시 온다는 믿음 속에서 비로소 시간은 흐른다.
여기서 한 가지 서늘한 의구심이 피어오른다. 연옥에 시간이 있다면, 연옥에 갇힌 존재들이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연옥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오지 않은 미래에 희망을 걸며, 비루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연옥 한가운데 갇힌 건 아닐까. 가톨릭 미사에서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이 기도는 왜인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처럼 들린다.
샤토브리앙의 문장은 중세사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자크 르 고프가 쓴 ‘연옥의 탄생’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르 고프는 연옥이 가톨릭 교리로 자리잡는 역사적 경로를 추적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승의 삶을 저승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연옥을 “이승의 부속 영지”로서 “삶과 기억을 연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연옥은 현세의 기묘한 복사본이다. 단순히 구원을 기다리는 공간이 아니다. 죽음조차도 인간의 욕망을 끊어낼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선언이자, 죽음 이후의 세계에도 욕망의 마수를 뻗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산 자들을 위해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르 고프의 이 말은, 죽음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신성과 무한의 지고한 가치조차도 오늘이라는 찰나를 위해 소진해 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것처럼 읽힌다.
“원생들은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갈수록, 그리고 그들의 천국이 자랑스러워지면 자랑스러워질수록 아무도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뛰어넘으려 하지 않는 울타리보다도 더 높고 안전한 울타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원장님께서 이 섬 위에 세우고 계신 천국이란 어떤 것입니까. 환자다운 환자들에게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환자로서의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는 체념 위에서라야 비로소 천국일 수 있는 천국, 오직 그런 뜻의 천국일 뿐이었습니다.”(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중에서)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올라가 보자. 그전에 우리는 한 작가가 치열하게 탐구했던 천국을 항한 사유의 궤적과 만나게 된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다. 또한 천국은 언젠가 도래할 곳으로서 지상 위 삶을 견디게 하는 영원한 희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도대체 언제란 말인가.
기다리다 지친 인간은 지상 위에 천국을 건설하려고 든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 원장이 그랬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소록도병원에 부임한 그는 섬을 낙원으로 조성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과연 천국이 인위적으로, 강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곳인가. 그 천국의 신민인 “환자다운 환자”란, 인간으로서 자율성을 포기한 존재일 뿐이다. 그 존재는 억압적 규율이 지배하는 ‘역설적인 천국’에 자신을 맞추고자 한다.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는 체념”을 통해서.
여기서 다시, 단테가 그렸던 지옥의 형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불행을 스스로 수락하며 체념한 환자와, 모든 희망을 버린 채 빼곡한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지옥의 영혼은 어딘가 닮았다. 희망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채 영원한 불길 위에서, 고통도 불행도 모르고 타들어 가는 이들이 머무는 장소를 과연 천국이라 말할 수 있을까. 조백헌 원장의 천국은 환자들에게 천국이 아니고, 환자들의 천국 역시 조백헌 원장의 천국이 아니다. 각자의 자유의지를 지워버린 이상향은 영원히 ‘우리’가 아닌 ‘당신들만의 천국’으로 겉돌 뿐이다.
오경진 문화체육부 기자·문학평론가
세줄 요약
- 단테의 지옥·연옥·천국을 통해 희망과 절망의 관계를 성찰
- 연옥을 미래가 있는 시간의 공간으로 해석하며 현실과 연결
- 이청준 소설의 천국을 체념 위의 역설적 낙원으로 비판
2026-11-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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